죽음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볼 수 있다면, 죽음을 만질 수 있다면, 그 모양과 질감이 과연 어떨지 상상해보게 합니다. 주인공 ‘나’는 죽음을 보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 주변을 맴도는 검은색 상징물이고요. 검은 나비, 검은 창, 검은 밧줄 등의 상징물이 주인공의 눈에 보이면 그 사람은 3일 안에 죽게 됩니다.
매력적이면서 익숙한 소재죠. 확정된 미래에 대한 예지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갈등하는 상황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비교적 쉽게 끌어올려주는 클리셰 중 하나입니다. 다만 이 작품처럼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나’는 타인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운명에 애써 개입할 정도로 적극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건 아마도 10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곧이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서 비롯한 트라우마 때문일 거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는 저런 특별한 능력도 별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무기력한 캐릭터 설정은 곧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게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별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장례가 끝나고 그다음 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임박한 죽음을 감지하는 주인공의 능력과 별개로, 저는 이 이야기가 어떤 서글픈 현실의 단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를 떠나보내자마자 제 자식을 버리는 아버지, 어린아이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낱낱이 각인시키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 이야기에 언급되는 어떤 죽음보다도 절망적이죠. 이 정도의 절망을 경험한 주인공이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그러나 사실 나는 딱 한 번 죽음을 막아선 적이 있다. 인생에 있어 단 한 번. 순전한 내 이기심 때문에.
그럼에도 그로 하여금 타인의 죽음을 막아서게 한 동기는 다름 아닌 ‘이기심’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기질이죠. 사실 주인공은 보육원 화장실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밤새 울어본 기억도 있고, 일용직 건설 노동자 동료의 장례식에서 유가족의 붉게 충혈된 눈을 똑바로 볼 수 없던 날의 기억도 가지고 있어요. 타인을 살리기로 마음먹게 한 이기심이란 것도 결국 그런 인간성의 한 갈래였겠죠.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인의 죽음에 개입했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 갑자기 빛을 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력감은 그대로 결말까지 죽 이어집니다. 그가 살린 여자는 발레리나였는데 다리를 다쳐 발레를 그만두게 되었고 ―전 이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부상 때문에 좌절한 예술가의 죽음’은 이제 너무 오래된 트릭처럼 보여요.― 이에 대해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죠.
그녀는 아이같이 몸을 웅크리고 잤다. 무슨 꿈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미간을 살짝 눌러 그것을 펴주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야기의 결말이 제목과 썩 잘 어울립니다. 작품 전반적인 톤이 제목과 결말에 일관적으로 스며들어 있어요. 만남인지 떠남인지, 낯섦인지 익숙함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질감이 여운을 남깁니다. 제 생각에는 이야기를 더 길게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주인공에게는 아직 소개하지 않은 사연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특히 인생에서 단 한 번 능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했던 여자와 함께 보낸 1년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이 남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길래 저런 결말을 맞이하게 됐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