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멸망까지 앞으로 1년, 이승에서의 모든 생존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지고 이제 인류에게 남은 선택지는 저승으로의 이주뿐입니다. ‘저승으로의 이주’라니, 그냥 다 같이 죽자는 말이 무색해서 실속도 없이 갖다 붙인 정치적 수사쯤으로 느껴지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야기는 처음부터 굉장히 역동적이고 위트로 가득합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인물들의 의지와 생명력이 흘러넘쳐요. 바꿔 말하면 이 이야기가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쇼를 선보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이 리뷰를 작성하는 시점에 저는 ’28 – 세인의 활약’까지 보았는데 ―등장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파악이 어려운 몇몇 인물은 논외로 하고― 모두 자기 색깔이 선명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오랜만이네요.
‘저승 이주 프로젝트’는 남은 1년 동안 인류가 사활을 걸어야 할 마지막 플랜인 셈인데, 그런 거대 프로젝트의 중심에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신입 공무원 ‘윤기린’이 있습니다. 전 인류의 운명이 한국의 어느 새내기 공무원에게 달린 거예요. 정작 그 공무원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고요. 개인적으로, 작품 속 세계관이 말이 안 되려면 이렇게 아예 안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이 생소하다고 해서 이야기의 매력이나 개연성까지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죠. 장르물에서 새로 구축된 세계의 룰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더 단단한 개연성을 갖추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이 만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주의 완벽주의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윤기린의 임무는 저승 답사입니다. 저승이 인류가 산 채로 이주하여 살아갈 만한 곳인지 미리 알아보러 간 거예요. 지구 탈출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핵심 주체로 한국과 한국인, 대전, 문화재청, 공무원, 신입,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설정은 약간 이색적으로 보이는데, 전 이 작품 도입부의 핵심이 바로 그 이색적인 포지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드업 단계에서부터 기존의 상식이나 익숙한 기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펼쳐갈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죠.
(오해 없으시길. ‘대한민국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여성 신규 발령자는 중요한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그동안 흔히 봐왔던 도식에서 약간 벗어난 포지션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택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말이지요. 물론 최근에 발표된 인상적인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이런 분석도 점점 힘을 잃어가는 듯 보이기는 합니다.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현상이에요. 예를 들어 배명훈의 『빙글빙글 우주군』(2020)에서는 한국군 중사가 전 인류를 구하는 작전에 거의 단독으로 투입되는데, 이를 두고 터무니없다며 코웃음 치는 독자라면 최근의 흐름에 무지하거나, 본인의 뒤처진 감각을 개선할 의지가 없거나 둘 중 하나겠죠. 마찬가지로 한국인 여성 캐릭터의 약진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다만 아직은 충분하다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더욱 중요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가 지닌 표현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으면서도 이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윤리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특히 ‘기린’과 ‘호랭이’의 관계에서 그런 성향이 두드러집니다. 이승의 기준을 적용하면 기린은 산 사람이고, 호랭이는 망자죠. 하지만 소설 속 저승에서 호랭이는 ‘사자’고, 기린은 ‘세인’입니다. 속해있는 공간의 속성에 따라 존재가 달리 규정되는 거예요. 당연하게도 기린은 저승에서 이방인입니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산 채로 덩그러니 저승에 데려다 놓는 순간 극단적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죠. 전 이 설정이 아주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는 기린이 저승에서 만난 호랭이에게 점점 복잡 미묘한 연정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인물은 모두 여성 캐릭터로 묘사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주 평범한 주인공이 소수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중층적으로 쌓아 올려가는 여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당연한 상식, 즉 소수자성은 그 자체로는 어떤 여분의 의미나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렇게 바라보는 건 맹목적인 다수의 편견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일깨우죠. 기린과 호랭이는 단지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을 뿐인데, 그게 연심이 되고 사랑으로 발전한다고 해서 둘만의 관계가 반드시 어떤 정치적 담론을 대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두 인물의 생기발랄한 관계는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동시에 각별히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설정한 배경 공간의 물성도 인상적입니다. 저승에 온 기린이 처음으로 묵게 되는 ‘마고’의 집과 일터는 다분히 토속적이고 정겨운 느낌을 줍니다. 몸은 고될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죠. 반면 ‘사아보호소’는 차갑고 각진 느낌이 들어요. 소설의 주무대인 저승의 도시 ‘한밭’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의 오랜 풍경을 반영한 듯 보이고요. 그러니까 이 작품 속 공간의 이미지는 현실의 그것과 아주 다르지만은 않습니다.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욕망도 마찬가지겠죠. 이렇듯 이 이야기에서 공간의 촉감은 그 안에서 인물들이 맺는 관계나 사건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품 속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 차원의 의문이 여럿 남아있음에도 몰입에 별 지장이 없는 이유도 아마 이야기 속에 배치된 공간들이 저마다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기 때문일 거고요. 특히 주인공들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주의 깊게 배려하는 모습은 ‘마고의 집’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8화까지 읽은 지금, 아기자기했던 기린의 저승 체험 에피소드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이제부터 무언가 격렬한 일들이 막 벌어지고 과거의 베일이 하나둘씩 벗겨지려는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요. 어느 정도냐면, 매회 분량을 26-27매 남짓으로 끊는 작가에게 반기를 들고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재미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