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으로 장대한 세계관을 구축해나가는 작품입니다. 이야기가 구조적으로 넓게 열려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든 스케일 있는 전개가 가능해 보입니다. 리뷰를 쓰는 시점에 저는 15회까지 읽었는데 아직까지 도입부의 중요한 플롯이 일단락되지 않았고, ‘기원의 힘’을 지닌 ‘에이드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지 드러나지 않았어요. 속도감은 떨어지는 대신 묵직한 한 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풍겨오는 서스펜스가 있습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만큼 강한 임팩트로 기대를 충족시켜줄지는 더 지켜봐야겠죠.
‘진’과 ‘제냐’는 쌍둥이 남매입니다. 아버지 ‘일케 자작’은 본인과 가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냉혹한 인물이고요. 부성애의 결핍 속에서 자란 쌍둥이가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해가는 설정은, 가문의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역학 관계와 주인공이 지닌 특별한 능력 같은 장치들에 거듭 포개어지면서, 중세 유럽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판타지의 장르적 색채를 획득합니다. 이 익숙한 조합의 성공 여부는 주인공의 능력으로 얼마나 강렬한 스펙터클을 연출해내느냐에 달려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도입부가 공들여 쌓아 올리고 있는 서사는 사실상 주인공의 능력을 폭발적으로 묘사하기 전의 응축 단계일 겁니다.
문장이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유려해서 읽는 내내 머릿속에 그림 같은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특히 ‘나보코브’ 영지와 ‘일케 저택’의 겨울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 좁은 공간에 감도는 긴장감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이 기억에 남네요. 이야기가 구축하는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잘 어울립니다. 낭만적 풍경에 대비되는 치밀한 내면 묘사, 간간이 선보이는 위트와 유머는 앞으로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자리 잡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한 마디로 읽는 재미가 있어요. 매회 서사 전개가 좀 더딘 듯해도 재미있게 읽히는 건 아마 문장이 가진 매력 때문이겠죠.
설정과 캐릭터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델 비다’ 왕국의 수도는 ‘루아’이고, 일케 자작의 저택은 델 비다 북동부 지방 나보코브 영지에 있습니다. 수도에서 저택까지는 마차로 열흘 정도 걸리는데, 극비리에 이 여정을 떠나는 일행의 이야기가 꽤 재미있습니다. 일행의 구성원은 제사장 ‘이바나크’와 그의 제자이자 왕녀인 ‘안테고니아(안)’, 식민지 출신의 ‘비살리아(비슈)’, 뛰어난 기사 ‘휘피디데스(휘프)’, 삯 마차꾼 ‘코니’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일케 저택에 가는 이유는 에이드나인 진을 수도로 데려오기 위해서입니다. 에이드나는 왕국법 상 가문을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케 자작은 딸을 수도로 보내 자신의 지위 상승을 꾀하는 듯 보이죠. 물론 이건 도식화된 설명일 뿐이고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셈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편 에이드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는 왕국의 제사장이 될 수 있는데, 이들은 ‘업보의 신체화’로 불리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고통의 종류와 강도는 저마다 다른데, 제사장 이바나크는 제 몸의 주도권을 놓고 또 다른 인격 ‘고골’과 주기적으로 싸워야 하는 업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업보는 제사장 캐릭터에 역동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도구 역할까지 톡톡히 해줍니다. 이야기 흐름 상 진에게도 언젠가 업보가 주어질 테고, 그건 진이 가진 기원의 힘과도 관련이 있겠죠.
아직 캐릭터의 윤곽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후 중요하고 매력적인 역할을 담당해줄 것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둘 있습니다. 삯 마차꾼 코니와 기사 휘프입니다. 코니는 소매치기였다가 전업을 했는데 아직 예전의 습성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걸로 보이고, 휘프는 젊은 나이에 백매화기사단에 오른 엘리트지만 말과 행동에선 인간미가 넘치죠. 이들이 앞으로 수도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아 그리고, 중간에 길을 잃은 휘프의 앞에 고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작품 도입부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니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