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해당 작품의 ‘연적(2)’ 회차 분량을 읽고 작성된 리뷰입니다. *
가족이나 일족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멸망 당한 주인공은 여러 소설을 통해 등장해왔다. 가장 가까웠던 개인이나 집단의 ‘부재’는 주인공에게 ‘모험’을 떠나게 하는 좋은 서사적 장치가 된다. 파이드파이퍼 작가의 장편 《모이라이의 총아》 역시 이런 방법으로 출발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원인이 등장하지 않는 학살 가운데에서 살아난 소년 ‘아슈라드’가 등장한다. 금발에 보라색 눈빛을 가진 그 소년은 자신이 속한 왕가의 일원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말한다.
“황제폐하, 만약 제게 아량을 베푸시려거든, 저를 거두어 가십시오.”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런 말을 요동 없이 할 수 있을까. 황제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들어 결국 황실의 시동으로 데리고 간다.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이었지만, 살아남은 아이의 눈에서는 어떤 복수의 의지도 타오르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는 건조하게 황실의 일원으로 자신을 거두어주기를 청한다. 그리고 십수 년 뒤, 소년 아슈라드는 황군의 백인대장인 켄타르초스가 된다.
거둠과 기름, 그가 황실에 들어간 진짜 이유
아슈라드가 청년이 된 이후의 장면에서는 여덟 살짜리 황녀 필로메아가 등장한다. 필로메아는 여느 황녀들처럼 귀엽지만, 종종 어른스럽고 싶어하는 작은 어린이다. 이런 필로메아와 아슈라드의 인연은 이번 생이 처음일 것이라는 보통의 예상과 달리, 소설은 의문스러운 암시를 내비친다. 아슈라드의 독백을 통해서 독자들은 그와 필로메아가 이전 생에서 모종의 인영이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암시는 드디어 소설의 중반에서 환상이나 꿈인 듯, 직접적인 묘사로 가시화되기도 한다. 이로써 아슈라드가 ‘복수’를 위해 황실에 침입했을 것이라는 독자들의 예상은 잠시 뒤로 밀리기도 한다.
아마도 아슈라드는 필로메아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잔혹했고, 누군가 죽는 사건이 여러 번 발생하는 비극을 낳았다. 그리고 전생의 아슈라드는 상당히 높은 직분(아마도 황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설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전생은 보통 완전히 이생과 단절된다. 그러나 소속 왕가에 불어닥친 피바람에서 겨우 살아난 한 소년이 전생의 기억을 간직했다는 부분은, 전생과 내세의 불완전한 단절을 암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독자와 아슈라드, 황녀가 가진 일종의 ‘정보량 차이’는 인물로서의 아슈라드에 독자가 더욱 몰입하도록 만든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황녀는 ‘아슈라드가 전생의 남편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이는 ‘현생의 필로메아’(이하 ‘필로메아’)에게만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정보값이 된다. 아슈라드와 독자가 알고 있는 정보를 필로메아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슈라드의 애타는 사랑에 독자가 공감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설의 여러 곳에 산재해있는 전생의 조각을 맞추는 것은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소설의 묘미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아슈라드의 전생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독자들 역시 한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아슈라드의 삶에 대해서는 아슈라드>독자>팔로메아의 순서로 정보량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여기에서 ‘독자’의 위치에 주목해야 한다. 독자는 아슈라드보다 무지하면서 필로메아보다는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이의 균형을 잘 맞추기 위해 작가는 소설의 중간중간에 아슈라드의 독백을 삽입하기로 한다. 이런 ‘밀고 당기기’를 통해 독자의 정보량을 조절하는 것이 이 소설 초반과 중반의 핵심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줄다리기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잘 이루어지고 있을까.
대체로 그렇다. 독자는 아슈라드의 전생에 대한 정보를 갈망한다. 작가는 이런 독자들에게 ‘분명한 암시’를 해주어야 한다. 독백과 내면 진술이 이를 잘 보완해주기는 하지만, 아슈라드가 필로메아를 향해 내비치는 애정 어린 시선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이런 약간의 부족을 해갈할 수 있는 건 ‘작가의 묘사력’에 달려 있다. 특히 소설의 중간에 삽입된 전생의 이미지들을 적절히 활용하면 분명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슈라드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희미한 암시가 아니라 장면적으로 보이는 분명한 암시는 독자들에게 작품을 읽는 추진력을 줄 것이다.
이 추진력을 줄 부분에 대해서는 한 회차를 할당했던 전생의 피바람 부는 악몽에 주목하고 싶다. 이는 적절한 흥미를 유발한다. 이렇게 명백한 전생의 이미지가 아예 다른 제목을 가지고 소설의 중간에 강렬히 삽입되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파이드파이퍼 작가의 장점은 담담하고 섬세한 묘사에 있다. 아슈라드의 생에서 가장 참혹했을 전생의 어느 순간을 현생의 그가 바라보는 시점에서 건조하게 서술한다면 독자에게 한 번에 알맞은 양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잔인한 그 장면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은 오히려 독자의 감정 이입에 도움이 된다. 불확실한 애정 표현이나 암시를 조금 덜어내고 일정 분량을 할당해 아슈라드의 전생을 정확히 보여주는 작업은 예상보다 소설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아슈라드는 자신이 황실에 숨어든 이유를 숨기며 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번 필로메아와의 시간을 보낸다. 이런 장면을 서술하는 작가의 문체는 정제되어 있고 읽는 데에 불편함이 없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나라와 지역, 배경의 묘사 역시 충실하게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했듯 파이드파이퍼 작가의 강점은 문장의 차분함에 있다. 대화의 여러 부분에서 종종 가벼워지는 분위기를 한 톤 낮춰 준다면 훨씬 더 균형 있는 진행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작가만의 개그를 보는 것 역시 재미있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괘념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아슈라드의 발언과 그 속도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아슈라드는 황제로 인해 가족과 가문의 사람들을 잃었다. 그 말은 언제든 그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위와 명예를 가졌다고 한들, 황제의 명 하나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순식간인 것이 일반적인 황국의 질서다. 이런 상황에서 아슈라드의 말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황녀에게 자신의 전생, 심지어 참혹했던 둘의 결혼 생활을 서슴없이 불어내는가 하면, 성년이 되지 않은, 나이 차이가 꽤나 멀리 나는 황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게다가 조금 위험스럽게도 미성년 황녀를 향한 ‘과한 애정 묘사1’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전생에서 아무리 부부의 연을 맺고 있다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언술은 작가의 재치로 무마가 된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아슈라드의 신변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또한, 위험한 발언들이 모두 매끄럽게 넘어가지는 상황과 발랄한 성격과는 다른 진중한 모습으로 아슈라드의 비밀을 숨기는 황녀는 다소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슈라드의 발언 자체는 언젠가 소설 안에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중반부에도 도달하지 않은 듯한 전개에 벌써 아슈라드와 필로메아의 비밀이 이토록 급하게 진전되는 것은 독자의 읽는 속도를 덩달아 재촉한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배경과 에피소드를 적절히 삽입하며 황녀와 아슈라드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속도를 다소 늦췄으면 한다. 그리고 위험부담이 없는 방향으로 (예를 들어 아슈라드가 황녀에게 전생을 말하는 장면을 ‘옛날이야기’나 ‘동화’로 바꾸어 말한다면 한 번 위험이 완충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에는 촘촘히 짜인 배경과 진행을 살펴보자. 이 부분 역시 전체적으로 흠잡을 것 없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황실과 황녀, 황태자, 그리고 아이기나의 왕자 히에로테오스까지,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상은 모두 부드럽게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한 배경의 설정을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종교’에 대한 것이다. 작가 역시 소설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도 언뜻 우려를 내비치긴 했지만, 이 소설의 종교를 ‘기독교’(작가가 가상의 종교를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읽는 이로서는 기독교의 색이 강했다)로 정한 것은 소설에 예상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실재하는 것’을 판타지에 녹일 때 흔히 발생하는 독자와 세계의 괴리감은 중요한 것이므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상당히 독자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종교이다. 4대 종교에 기독교가 들어가는 만큼, 그 형태와 종파는 다양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기독교’와 ‘가톨릭’ 신자들이 다니는 교회와 성당이 상당수 존재한다. ‘일상성’을 가지고 있는 물건, 또는 배경, ‘종교’ 등을 특별히 판타지에 녹여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자칫 독자들이 ‘환상’ 속의 소설에서 ‘일상’을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교회’, ‘레위기’ 등 분명한 현실의 종교를 가리키는 단어를 만나는 독자는 ‘판타지’의 세계에서 순간, 무의식중에 현실을 감지한다. 상상 속의 세계를 잘 꾸려나가던 진행에 약간의 어긋남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마치 꿈을 꾸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현실로 가는 문이 열리는 것과 같다. 심한 경우 독자의 몰입이 깨질 수 있으니 적어도 ‘판타지’나 작가가 아예 새로 구축한 세계관에서는 ‘현실’의 물건을 다루는 데에 능숙하고 때로는 교묘해야 한다.
《모이라이의 총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기독교’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더욱 독자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심지어 군대의 직위나 관직의 명칭도 전부 소설 안의 언어로 바꾸어 내고 있다. 이런 치밀하고 새롭고 이국적인 세계에서는 현실의 종교가 존재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종교’를 가진 나라를 등장시켜야 한다면, 아예 소설 속의 종교를 하나 만들어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 편이 훨씬 독자가 글을 읽는 데에 매끄러운 방향이 될 것이라 본다. 그리고 세계관을 짜는 방식으로 보아 파이드파이퍼 작가는 분명히 기독교보다 더욱 소설에 꼭 들어맞는 종교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
이처럼 언술 방식의 진행과 배경에 유의하며 이 작품을 다시 본다면 조금 더 나은 길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다. 《모이라이의 총아》는 모든 요소가 거의 빈틈없이 짜인 퍼즐과 같다. 이런 퍼즐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독자의 시선과 작가의 의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독자의 의견을 조금 덧붙여 보았다. 그러나 최종의 결정은 역시 작가의 몫으로 남긴다.
맺으며
환생의 과정에서 끊이지 않는 기억으로 인해 어린 황녀를 사랑하는 아슈라드의 상황은 퍽 로맨틱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피와 복수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이 소설의 끝을 빨리 보고 싶다는 긍정적인 긴장을 심어준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가능성이 훨씬 많다. 판타지에 대한 상상과 뛰어난 묘사가 맞물리며 진행되는 작품을 읽는 것은 독자로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파이드파이퍼 작가의 다음 작품과 이 장편이 나아갈 길을 기대하며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