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바로니아 연대기 ‘죽음의 기사’편에 대한 내용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오래전부터 신의 존재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신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상상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별 어려움 없이 해낸다. 그들의 힘은 초월적이고 광대하다. 그렇기에 보통의 신화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진행된다. 능력의 근원이 위에 있기 때문이다. 신은 위대하기에 신화는 대체로 그들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방향으로, 누군가를 돕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미천한 인간에게 강림한 신은 육체에 갇혀 이루지 못하는 소원을 들어준다. 그렇게 신은 수많은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고, 그들을 관리하고, 때로는 멸한다.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연장되는 신의 이야기는 어떨까. 불멸의 존재가 하나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하는 이야기는 어떨까. 어쩌면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삶의 끝자락에서 ‘선택된’ 신이야말로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건, 벼랑 끝의 이야기
바로니아 연대기는 장편의 프롤로그이자 신들의 전생을 다루는 내용이다.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가 망해가는 나라의 왕과 그 소녀를 끝내 사랑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면, 다른 하나는 어둠으로 온몸을 두른 것 같은 사내의 삶을 다룬다. 하나의 주인공은 망한 제국의 마지막 왕이지만, 다른 하나의 주인공은 ‘죽음의 기사’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죽음을 몰고 온다는 기사이다. 둘의 삶은 언뜻 보면 접점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연작인 두 작품의 제목을 보지 않는다면 따로 쓰인 두 편의 단편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끝까지 읽으면 비로소 둘의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혼돈’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의 삶’이다.
혼돈은 예로부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성경에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 바다와 궁창을 나누기 전의 모습을 혼돈이라 하고 중국 신화 역시 ‘동물’의 이미지로 혼돈을 형상화한다. 번역과 원문에서 어감의 차이가 조금씩은 있지만 대체로 ‘혼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그 모습이 뚜렷하지 않거나 사람의 언어로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바로니아 연대기의 혼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너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이지?”
“혼돈, 그대들을 이 세계에서 꺼내줄 마지막 사다리.”
혼돈은 다 끝나가는 인간의 삶에 손을 내민다. 혼란과 공허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삶의 끝을 내다보던 로헤튼, 타냐스, 그리고 하레스의 앞에 한 줄기 사닥다리가 놓인다. 그리고 세 명의 인물은 그 위에 위태하게 앉아 삶의 선택지를 저울질하며 가늘게 웃는 혼돈을 마주한다. 혼돈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다양하다. 그러나 제안하는 것은 한가지로 같다. ‘자네. 신이 되지 않겠나.’
인간으로서 신이 되는 상상을, 막연하게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신’이라 명명하지 않더라도 불멸, 불사, 또는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를 옥죄는 제한을 넘어서기 위한 ‘미지의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이런 가정 뒤에 따라오는 상황은 보통 긍정적이다. 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이렇게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반갑게 그것을 잡을 수 있을까.
타냐스와 로헤튼 역시 처음에는 혼돈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이미 마음은 혹해서 넘어갔지만, ‘불신하는 투’에서 느낄 수 있듯, 로헤튼은 쉽사리 자신의 앞에 놓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된 여인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공주의 안위를 혼돈에게 의탁한다. 원래 명보다 빠르게 세상이 끝나도 자신만은 주어진 삶을 다 살기를 빈다. 혼돈은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지만 그대가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방법은 이렇듯 예측 불가능하다. 어둠의 신력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타냐스와 빛을 숭배하는 나라의 로헤튼에게 걸맞는 자리를 주면서 혼돈은 스스로 짧은 인간의 이야기를 맺는다.
이 작품을 보며 ‘혼돈’이라는 추상명사를 캐릭터화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다. 이 혼돈은 인간도 아니고 신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있다. 굳이 명확히 결론을 내리자면 인간이었던 존재를 신으로 환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보자면 신보다 상위의 자격을 가진 셈이다. 혼돈은 언제나 세상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추상의 최상에 놓인 혼돈은 늘 세상이 구체적으로 바뀌기 이전의 시간을 채운다. 다소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보자면 혼돈이 세상의 처음이 아닐까. 태초부터 살았던 혼돈이 만난 이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
혼돈이라는 이름을 걸고 신으로 택하는 인간이 범상할 리 없잖은가.
가장 인간적인 신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들
나는 이 소설의 세계관이 어떻게 뻗어나갈지 알지 못한다. 짧은 한두 개의 단편을 보고 ‘신화적’인 세계관의 처음과 끝을 재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세계 안의 신들이 얼마나 다양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았을지는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다. 바로니아 연대기의 신은 인간이었기에 자신들이 관리할 이들의 삶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끝을 보았던 군주, 그리고 그녀를 지키고자 했던 콧대 높은 황자. 자신의 신념을 꺾고 어린아이를 끝내 죽이지 못했던 한 기사. 그들이 신이 된 데에는 작가가 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음에 뻗어갈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신들의 초기 설정이 인간의 세계에 반드시 관여할 것이다. 신들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단편들이 저마다 개별적인 줄거리를 갖는 만큼,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며 이들이 자신의 전생을 반드시 한 번쯤 기억해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신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매력적인 연작이기에 독자로서 더 많은 신의 전생이 궁금해진다. 한낱 인간의 전생도 밝혀내지 못하는 우리가 신의 전생을 엿본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아시하누 작가는 특유의 세계관으로 인간이었던 신을 묘사한다. 그들이 사는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그를 삶의 끝자락까지 몰고 갔는지, 그 끝에서 어떻게 혼돈을 만나 신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혼돈과의 연결점은 늘 생의 끝에 있다. 모든 것을 놓기로 작정했을 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은 망설여지지만, 더 많은 것에 대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환생의 시작이 ‘신’이라는 지위에 있다면 더욱 기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연대기’는 길고 광범위한 시공간적 배경을 떠올리게 한다. 연대기에 신화를 삽입한다는 것은 땅 위의 이야기가 아닌 하늘 또는 이공간의 세계를 다루겠다는 귀띔과 같다. 이런 정보를 우연히 알게 된 독자로서 기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작품에서 내가 본 것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분투한 한 소년과 망국의 왕으로서 끝까지 위신을 지킨 소녀,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꺾으면서까지 아이를 구하려 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균열과 불완전, 고민이 있는 세상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하였다면 세상과 인간 역시 그들의 안에서 잘 굴러갈 수 있지 않을까.
연대기의 시작을 들춰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리고 작은 것으로부터 큰 세계를 훑어가는 일은 여행과 같다. 그 긴 여정의 시작점에서 만난 세 명의 인물과 하나의 신비로운 존재는 독자에게 이 세계에서 지루할 틈은 없을 것이라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을 촘촘히 얽어갈 작가는 자신이 얼마나 이들을 묘사하기에 걸맞는 문장을 쓰는지 보여주었다.
이아시하누 작가의 문장은 현대물과 판타지 모두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많은 작품 중 바로니아 연대기에 유독 잘 어울리는 문체를 가지고 있다. 다른 작품들이 질투를 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들에 꼭 맞는 글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아시하누 작가의 문장은 속도감 있고 분명하다. 하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유머러스한 문장은 독자들에게 글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재치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 같다.
여행의 처음에서 만난 동지가 이렇듯 단단하고 때로 따뜻하며, 균열에서 자신과 남을 생각하는 유머러스한 이들이라면 이 걸음을 주저할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작품들에 이어질 다양한 인물과 세계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작가가 만들어낸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이들의 세상을 엿보기로 했다. 재미가 증명된 여행을 망설일 이유는 없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을 내디뎠으니 그다음은 어떨까.
어쩌면 혼돈이라는 이름의 누군가가 나에게 찾아와 내게도 신이 될 기회를 준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궁금해하며, ‘신’이라는 이름의 동지들과 함께 여행할 다음 세계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