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 번의 이상한 꿈을 꾸어 하루를 망치는 경우가 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호한 꿈이 아닌,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불쾌한 이미지가 다음날까지 남는 것은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일 동안 지속되는 악몽은 어떨까. 현실에서는 다행히 그럴 일이 없지만, 악몽이 형상화되어 인간을 괴롭히는 마물이 된다면 사람이 겪게 될 정신적 재앙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그 괴물이 한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마법과 꿈이 형체를 띤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꿈속에서 인간을 괴롭힌다는 마물인 몽마(夢魔)는 예로부터 신화, 전설, 민담을 가리지 않고 등장했다. 최근, 영화 〈가디언즈〉에서 악몽을 선물하는 존재로 등장한 ‘피치’ 역시 몽마의 성향을 가진 캐릭터로 보인다. 몽마는 인간에게 정신은 물론 육체적인 쇠약을 겪게 한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악몽을 형상화한 이물이 존재했으니 나쁜 꿈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만든 악몽의 현현은 때로 어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끔찍한 기억을 선사하고 사라진다. 몽마에 관한 창작물을 보고 있자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사람을 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수를 하기 위해, 아니면 단순한 장난을 위해. 몽마의 뒤에 감추어진 이야기는 그러므로 종종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여기, 한 가문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경구가 있다. ‘몽마는 황제를 삼키지 않는다’. 사람을 가려 악몽을 주는 몽마라니. 아마도 황제는 몽마가 건들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거나, 악몽을 꿀 필요 없을 정도로 대단히 착한 인물일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황제를 제외한 모든 백성이 원인 모를 몽마에 고통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황당한 괴물을 불러낸 이는 누구인가.
몽마를 불러내는 가장 완벽한 방법
이 작품의 제목은 상당히 흥미롭다. 황제만을 습격하지 않는 몽마는 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결론적으로 작품에 대한 독자의 접근성을 높인다. 현실에 없는 이물과 괴물의 등장은 작가와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한다. 현실에 있지 않은 마물을 등장시켰으니 사실을 뛰어넘는 현상이 등장하겠구나. 독자는 이렇게 예상할 수 있다. 흔히 이물을 소환하는 과정 역시 상당히 신비롭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장면에 대한 기대도 역시 독자가 판타지물을 읽는 이유에 한몫한다. 그럼 작품의 진행을 처음부터 따라가 보자.
몽마가 한 나라를 휘젓고 돌아다닌다. 이유불명인 몽마의 습격으로 거대한 공동체가 휘청이고 있다. 기존의 작품에서 일차전으로 정신적인 영향을 미치던 관습과 달리 이 몽마는 형체를 분명히 띠며 신체적으로도 상해를 입힌다. ‘습격’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몽마의 등장은 민심을 흔들었고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백성의 불신일 터였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황실이 내놓은 답안은 ‘마녀’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마녀는 주술을 부리는 이들이니 몽마의 등장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며, 처형식을 통해 민심을 한군데로 집합시킬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방안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마녀로 몰린 사람들은 크라우제 후작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으레 추리를 요하는 소설에서 처음 범인으로 몰리는 인물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작가는 반드시 한 번 이상 범인의 정체를 꼬아 두기 때문이다. 크라우제 후작의 가문은 다소 허망하게 마녀로 몰려 처형을 당한다. 초반의 흐름에서 보완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몽마를 만든 것에 대한 죄목을 후작가에 뒤집어씌우는 상황이 예상보다 매끄럽고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 좀 더 굴곡을 준다면 제국의 정치적인 빈틈이나 마녀사냥의 과정이 더욱 부각될 수 있다. 황국 특유의 정치적 구조에 대한 언급이나 정당, 당파에 따라 분분한 의견을 추가함으로써 충분히 초반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보인다.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크라우제 가문의 처형 후 몽마는 당연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몽마를 불러내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커피’가 거론된다. 커피는 각성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악몽을 몰고 다니는 몽마와 하나의 음료가 그럴듯하게 연결이 되는 지점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몽마와 마주할 위험을 줄인다고 에릭은 황제 요나스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후반부의 반전을 위한 정교한 장치이다.
“폐하, 몽마는 황제를 삼키지 않습니다.”
에릭이 요나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이 문장 역시 결말에 방점을 찍기 위한 것이다. 사실 요나스는 황제로서 살아갈 운명이 아니었기에, 에릭은 요나스에게 자신이 황위를 이을 것임을 넌지시 예고한 것이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제목과 처음, 그리고 끝은 소설 전체에 통일감을 부여하며 궁극적으로 에릭이 아주 오랫동안, 끈질기게 요나스의 주변에 머물며 기회를 노렸음을 보여준다. 반전을 위한 장치를 곳곳에 분명하게 배치한 것이 소설의 흥미를 높이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최후의 반전을 위해 에릭이 극도로 절제를 요구했던 음료인 ‘커피’는 어떨까. 이 음료가 과연 독자들에게 최대한의 매력을 주는 방향으로 사용되었을까. 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커피’라는 음료의 속성에 대해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커피’는 지금을 사는 독자들에게 가장 가깝고 친근한 음료이다. 커피는 일상성을 드러내기에 탁월하며, 반복되는 삶을 각성하기 위해 종종 많은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런 음료가 환상적이고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판타지 소설에 쓰인다면 독자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물론 커피 열매 자체는 이국적이거나 비일상성을 일부 내재하는 방향으로 창작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음료’ 자체가 주는 이미지는 아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일상성을 보이는 ‘커피’보다 더 새롭고 ‘독특한 음료’를 다루는 방향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싶다.
커피는 독자들과 가까운 음료인 탓에 오히려 소설의 비일상성을 일상성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경향을 보인다. ‘커피’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독자는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과 일상을 감각한다. 비일상에서 벗어나는 음료를 소재로 사용하였음에도 충분히 좋은 결말과 구조를 가진 이 단편에 필요한 건 사소하지만 중요한 변화다. 〈몽마는 황제를 삼키지 않는다〉는 비일상의 최전방에 있는 ‘마물’을 다루는 작품이기에 작가가 충분히 소설의 환상성을 부각할 수 있는 좋은 음료를 만들어낸다면 두 배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을 작가에게만 맡기는 것은 무책임하므로 작품을 읽으며 했던 음료에 대한 공상을 공유해본다. 음료의 이름은 ‘꿈’을 뜻하는 라틴어 sómnĭum(솜니움)을 어원으로 하면 그럴듯할 것이다. 발음하기 쉬우니 여러 접미사를 붙여 변용이 용이하다. 적게 먹으면 수면에 도움을 주지만 많이 먹으면 각성제가 된다는 상상의 음료 역시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다. 그 분량을 조절해 황제의 꿈을 확실히 추락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상상력은 바로 이 음료에 담겨야 한다. 시각적으로 신비로움을 부각할 수 있는 오묘한 색이 음료에 있다면 어떨까. 이 재료와 저 재료를 첨가할수록 맛이나 효능이 변화하는 차는? 실제로 아주 오래 전 신화에 등장한 신비스런 음료를 차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몽마와 어울리는 흑색의 음료도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다양한 차를 떠올리며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비일상성’의 복귀이다. 몽마를 다루던 가문이 할 수 있는 최후의 강렬한 복수를 위해 준비된 차는 여간 신비롭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몽마가 죽이지 않는 단 한 사람. 에릭의 잔혹하고 화려한 귀환을 위해 준비될 차 한 잔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독자에게 더할 것 없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
〈몽마는 황제를 삼키지 않는다〉는 상당히 명확한 복선과 뚜렷한 반전, 그리고 확실한 동기와 인물의 성격이 좋은 특징이 되는 작품이다. 위에서 말한 보완점은 사실 독자로서 바라는 것일 뿐 보편적인 감상이 아니기도 하다. 작가가 쓰고자 했던 이야기가 단편의 안에 얼마나 실려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로서 읽으며 상당히 단단한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클라이막스를 본 기분이 들었다. 우정인 줄 알았던 하나의 관계를 무참히 깨고 자신의 왕좌를 위해 수없는 시간을 참아낸 사람. 에릭의 이야기를 모두 읽으니 코끝에 진하고 묘한 음료의 향이 스치는 것 같다.
이 잔혹한 복수의 끝에 주어진 플라디우스와 칸느시아 가문의 정치적 위계와 얽힘의 관계,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짧게 쓰인 뒷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성을 감싸는 몽마의 포효가 들려오는 듯하다. 빠르고 강하게 끝맺은 이 소설이 몰고 온 폭풍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경구이자 예언이었던 하나의 문장은 결국 이렇게 완성된 셈이다.
황제는 몽마에게 삼켜지지 않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