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은 달달한 커피부터 아포가토와 플랫 화이트를 좋아하는 이들까지 모두가 들를 수 있는 새벽의 커피가게가 문을 열었다.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커피값 대신 지불하면 되는 낭만이 있는 곳이다. 정엘2 작가의 소설 〈어서오세요, 새벽의 커피가게에〉에 실린 네 사람의 목소리는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조각이다. 흔하디흔한 ‘카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커피가게’라고 부르니 더 정감이 간다. 이 가게에 들른 손님들은 저마다 어떤 모양의 이야기를 값으로 지불했을까. 그리고 수익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곳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새벽에 문을 여는 커피가게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궁금할 수밖에. 그냥 지나치지 못할 수밖에.
그러니 어서 오세요, 새벽의 커피가게에
음식을 파는 가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을 읽으며 생각난 소설이 있다. 마오우 작가의 장편 『열여섯 밤의 주방』은 〈어서오세요, 새벽의 커피가게에〉와 마찬가지로 손님을 받고 주인이 음식을 차려 주는 구성이다. 아마 『열여섯 밤의 주방』을 읽은 독자가 있다면 거의 대부분 정엘2 작가의 이 소설에서 위의 책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 두 작품은 상당히 유사한 전개를 가진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
첫째로 보이는 가장 큰 공통점은 무엇일까. 소설이 진행되는 주요 공간이 ‘음식을 차려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에 있다. 커피의 ‘값’으로 이야기를 듣는다는 커피가게와 ‘생전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을 차려 주는 지옥의 주방은 이야기 전체를 감싸는 ‘바깥 세계’에 해당한다. 짧은 단편이 연달아 이어지지만, 내부의 상황과 별개로 외부의 스토리 역시 전개된다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음식에 대한 값을 받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음식과 함께 독자들은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삶의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역시 두 작품 모두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그러나 첫째 되는 공통점인 외부 공간은 이 두 작품에 큰 차이를 만들기도 한다.
둘의 차이점은 바로 ‘공간의 정체를 밝히는 시점’에 있다. 『열여섯 밤의 주방』은 초반부터 공간에 대한 설명이 들어간다. ‘지옥의 주방’이라는 공간의 설정이 제시되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서오세요, 새벽의 커피가게에〉는 결말부에서 반전을 위해 공간에 대한 비밀을 밝힌다. 현세에 자리잡은 외계인들의 커피 가게냐, 저승에 있는 망자를 위한 주방이냐에 대해, 그러니까 어느 공간이 더 매력적이냐에 대해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두 작품의 구조와 문법은 완전히 다르다. 둘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장 적절한 곳에서 장소의 정체를 밝혔다.
이처럼 장소가 큰 역할을 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공간에 대한 설명을 언제 해야 할지 ‘타이밍’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매력적인 장소라 하더라도 소설 안에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두괄식으로 커피가게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렇다면 독자들은 다소 이질감이 있는 장소성에 대해 계속 의문을 느끼며 소설에 몰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미괄식으로 지옥 주방의 정체가 밝혀진다고 한들 말이 되지 않는다. 지옥 주방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밀고 나아가는 힘이 있기에 반드시 소설의 머리에 등장해서 뒷이야기에 맥락을 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의 커피가게 역시 여러 방향으로 그 공간을 설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중편의 결말은 교체할 수 있는 전구와 같다. 어떤 신비로운 이야기를 끼워도 잘 맞아떨어질 것 같은 맺음에 작가가 등장시킨 것은 외계인이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던 작품에 큰 반전을 주는 대목이다. 은은하고 향기로운 결말을 기대하던 독자들에게 이 부분은 약간의 충격을 주기도 한다. 충격에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커피가게의 정체가 밝혀지는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신선함에 있다.
뻔하게 끝날 수 있는 소설에 ‘지구의 정보를 수집하러 온’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한다. 자신들의 행성에서 가져온 특수한 물로 손님들을 속여 넘기는 재미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들 역시 하나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스스로 커피를 타 먹지 않는가. 지구인의 삶을 커피와 맞바꾼 대신, 자신들도 외계인으로서의 이야기를 지구에 제공하고 가는 셈이다. 익살스러운 외계인들의 대화는 우주의 조각을 전해준다. 지구의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커피값으로 독자들에게 쥐여준다. 그리고 마치 다음이 이어질 것처럼 여운을 남긴다.
현실에 강림한 이상주의자에게
인간은 분명히 자연을 파괴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진행형이다. 하지만 지구에 카페를 차린 외계인들은 지구에서 ‘인간’을 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대화에서 보이는 독특한 시선을 통해 작가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관심을 보인다. “터무니없는 파괴자”일 뿐인 인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먼 우주에서 찾아온 그들은 이 행성에 세워진 문명 역시 존중한다. 작가는 결말에서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하기보다 작은 이야기의 연대에 주목했다. 이전의 여섯 편이 그러했듯이, 수십억이 넘게 바글대는 인간들이 어떻게 서로와 이어지는지에 귀를 기울였다.
이 작품은 그러므로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아카이빙’이라는 외계인의 방문 목적에 기반한 판단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고 ‘왜 작가는 더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담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잘 짜인 테두리의 공간이 이렇게 마무리되기에는 너무 아깝다. 게다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서로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기에 인간 모두의 이야기를 들었다기에는 더 채워야 할 무언가가 남아있다. 외계인들의 지구 방문은 다양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이에 초점을 두자면 독립적이고 많은 수의 인물이 나오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품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의도를 표면적으로만 파악한 것이다.
외계인들은 ‘파괴자’인 사람의 존재와 그들의 문명을 모두 존중했다. 그들이 지구를 방문한 목적에 주관적인 호기심이 개입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카이빙은 객관적이고 방대한 자료의 수집 과정이다. 그러나 외계인들은 이를 핑계로 그저 작은 카페에 앉아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시콜콜한 대화의 값으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제공하면서. 그렇게 보자면 작가는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가장 작은 인간군상을 표본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노인부터 젊은이까지, 심지어 사람과 유령에 걸쳐 있는 삶의 이야기는 짧지만, 모두의 인생에서 발견되는 단면을 포함한다.
지구의 모든 사람에 대해 다루지는 않았어도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짧은 분량 안에 담고자 했던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정제된 문체와 만나 하나의 매듭을 만든다.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와 외계인들의 지구 방문 목적, 그리고 단편적으로 만난 네 명의 삶을 기억하며 가슴 깊이 스며드는 따스한 커피 향을 맡는다. 외계의 누군가라면 마음 편히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러니 현실에 강림한 이상주의자여. 지구를 다시 한번 지구를 찾는다면, 꼭 내가 사는 이 동네에 들려주소서, 라고 한 줄의 바람을 읊으면서.
맺으며
내 이야기와 남의 인생이 만나는 접점은 언제나 반갑다. 그러므로 앞서 말했듯 이 작품에서 독자들이 유일하게 (희박한 확률로) 느낄 수 있는 아쉬움은 ‘더 많은 인물’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등장하는 인물의 수와 분량을 정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니. 그리고 이 단편은 네 명의 방문에서 깔끔히 끝을 맺었다.
지구에서의 에피소드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우주에 산재한 이들의 인생을 탐색하는 그들이 또 누구를 찾아, 무엇을 주고, 어떤 값을 받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러나 외계인과 통신할 수 있는 이는 소설의 세계를 창조한 작가뿐이니,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나온 이야기를 뜨겁게 사랑하며, 혹시 있을 다음 여정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일 테다. 지구를 찾아온 그들의 기억이 부디 나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부디 그네들이 만난 이들은 인간이 전부가 아니길.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당신들의 따스한 향기 속에서 피어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