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라는 글자에는 현실의 귤과 아무런 유사성이 없죠. 현실의 귤은 둥글고 말랑말랑하죠. 반면 귤이라는 글자는 아주 모나게 생겼죠. 그런데 우리는 지옥의 왕이 18개월령 아기에게 귤을 먹인다는 묘사를 보고 귤의 촉감과 손톱을 박아 당기면 찢어지는 껍질과 입 안에서 터지는 식감과 맛과 냄새 따위를 떠올리잖아요.
공지 “업데이트 주기에 관한 양해말씀”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을 다 늘어 놓으면 괜히 작가님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집필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해서 좀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독자 의견이라는 것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싶었습니다. 작가님은 글을 썼다 지웠다 했다고 하셨는데 저도 이 평을 썼다 지웠다 했습니다. 아니 이게 뭐라고.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주워섬기는 게 민망하고 작가님은 작가님대로 긴 탐색과 번민의 시간을 보내 오신 것 같은데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떠들어 볼게요. 단어로서의 “귤”과 실체로서의 과일 “귤”의 관계는 전적으로 학습된 것이죠.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과 상상의 과정을 통해 머릿속에 세계를 재현해야 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과정이죠. 이게 소설가의 원천적인 고뇌에 한 몫 하는 게 아닐까 싶고요.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건가? 이렇게 쓰면 알아들을까? 무엇보다도, 이게 재밌을까? 소설은 글자, 글자, 글자의 연속만 갖고 인물과 배경과 사건을 묘사해야 하고 시간과 공간을 다뤄야 하니 소설가는 마치 단검 한 자루로 의식주를 완수하는 산악의 생존전문가 같은 것이죠. 심상을 글로 표현하는 부호화의 작업 자체도 고된 지적 노동이지만 그렇게 수고해서 만든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마음에 드는 경우보다 훨씬 많을 것 같네요. 글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면 더 초조하죠. 재미있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지우고 다시 써야 할 것 같고요. 뭐 그럴 것 같네요.
그래서 소설은 되먹임이 각별히 중요한 매체인 것 같은데요. 물론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 중요하죠. 글쓰기는 극도로 시간집약적인 노동이고 현대인은 생계를 감당해야 하니까 글이 돈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전업 작가를 할 수 없겠죠. 하지만 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나는 이렇게 읽었다, 이 부분은 이렇더라, 저 부분은 저렇더라… 하는 평가인 것 같습니다. 아주 많은 연재 작가들이 “계속 댓글을 달아 주신 아무개 님 덕분에 끝까지 쓸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또 거꾸로 악플 때문에 절필하는 작가들이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님은 전에 순문학에 뜻을 두셨다니 하는 말이지만 원래 신춘문예도 각종 문학상도 시, 소설, 희곡 등등 공모 부문 중에 “평론”이라는 부문을 떡하니 두고 있잖아요. 비평의 역할이 문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예전부터 다들 알고 있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평가라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저는 예전에 수학을 참 못 했는데요. 수학 잘 하는 학생이 수학 못 하는 학생의 수학 실력을 평가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거꾸로 수학 못 하는 학생이 수학 잘 하는 학생의 수학 실력을 평가할 수 있을까? 불가능합니다. 평가를 하려면 평가관이 응시자보다 더 뛰어나든지, 그렇진 못하더라도 상당한 조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건데요. 수많은 웹소설 댓글란은 악플 시궁창으로서 역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죠. 다행히 브릿지는 그래도 청정합니다만… 대부분의 웹소설 플랫폼은 작품의 평균 수준과 댓글의 평균 수준을 비교한다는 것이 민망한 형편이죠.
이런 말씀 드려서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 읽는 건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지만 소설 읽기는 별로 취미가 아닌 사람입니다. 제 생각에 소설 읽기라는 취미의 가장 큰 난관은 읽을 만한 소설을 찾는 거거든요. 이 세상에는 소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도서관의 문학 서가에 가 보면 정말 너무… 많잖아요. 아니, 수적으로 많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아주 많아지는 중이고요. 돌려 말했지만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게 말하면 까다로운 안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소설을 읽으려다가 이건 이래서 안 되겠고 저건 저래서 안 되겠고… 해서 집어던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답답해서 한 소리 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실제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것을 기어코 실천에 옮기게 만든 사람은 한애선 작가님이 최초인 거죠. 이 사람은 계속 좀 썼으면 좋겠는데 싶어서요.
저는 〈지옥의 왕 전업주부〉를 발견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웹소설 시장이 최근 몇 년 새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웹소설로 돈을 얼마나 벌었다는 몇몇 인기 작가들의 이야기가 회자되고, 그러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웹소설을 써 보겠다고 몰려들고 있는데… 홍수가 나면 소도 떠내려오고 집도 떠내려오는 법이니까 거기서 옥석을 가리기는 원래 어렵겠죠. 〈지옥의 왕 전업주부〉가 이미 무려 14회나 연재했는데도 아직도 전국을 강타하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저는 타인의 글을 적극적으로 평하고 감상을 남기고 무엇보다 그것을 작가에게 직접 전달한다는 것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옥의 왕 전업주부〉를 보니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구나, 세상에는 이미 소설이 많은데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더 많고 독자의 관심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런 명작이 묻힐 수도 있겠구나. 안 되겠다 싶어서 뭐라고 댓글도 달고 평도 쓰고 격려의 말씀도 드리려 해 보았는데…
〈지옥의 왕 전업주부〉는 재밌어요. 그런데, 그냥 재밌다고만 말씀 드리면 와닿지 않으시겠죠. 꼭 완결까지 쓰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글쓰기는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인데 (그래서 저도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글에 심각한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사람이 의지력만으로 뭔가 무거운 일을 감당하려다 보면 실패하기 마련이잖아요. 그것은 그 사람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력은 원래 한정된 자원이기 때문이고요. 작가님이 끝내 절필하거나 혹은 완결을 내긴 냈는데 백년 뒤에 냈고 그때쯤 저는 이미 백골이 진토된 지 오래라 해도 누구도 작가님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14화까지 읽고 저는 느꼈어요. 어이어이… 이 작가는 「진짜」라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 법이니 이런 제안을 드려볼까 합니다. 전업 작가에게는 편집자든 누구든 지속적으로 되먹임을 제공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한애선 작가님은 “아직은” 프로가 아니시니 전담 편집자도 없겠죠. 물론 제가 평론가로서 대단한 자질이 있을 리 없거니와 소양은커녕 작가님께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얘기를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은, 건설적 가치가 없는 악플을 제외하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어요? 〈지옥의 왕 전업주부〉의 연재 분량이 쌓일 때마다 해당 분량에 대해서 제 나름의 감상과 분석과 제언 따위를 펼쳐 보고자 합니다. 비평의 밀도를 생각하면 연재분 5회에서 10회 정도를 묶어서 보는 게 적절할 것 같네요. 언제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올릴 수 있을지는 저도 몰라요. 작가님이 전업 작가가 (아직) 아니듯 저도 전업 평론가가 아니고 제게도 생업이 있는지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차에 치였다든지. 그러나 읽고 쓰기가 가능한 상태라면 어쨌든 계속 해 보려고요. 당장은 20화가 나오면 한번 해 보려고요. 제가 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마는 없는 것보단 낫겠지, 지도 없는 길을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요.
물론 작가의 성향에 따라 한 사람의 긴 비평보다는 열 사람의 짧은 소감을 선호할 수도 있는데요. 다른 분들의 일은 다른 분들의 몫이니…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요. 다른 분들도 비평이든 독후감이든 한 줄짜리 응원이든 해 주시겠지.
작가님은 “따뜻한 관심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따뜻한 관심… 물론 따뜻한 것도 맞고 관심도 맞지만… 이를테면, 작가님은 아직 부족한 사람인데 독자들이 하도 관대해서 곰살스럽게 덕담도 해 주는 것이다? 적어도 저에 한해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지옥의 왕 전업주부〉는 대중소설의 모범입니다. 작품에 대해 세부적으로 따져 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이 글은 이미 너무 길어졌으니 그건 앞으로 이어질 비평에서 집적거려 보겠습니다. 다만… 무엇을 쓰시건 제가 아는 그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은 저는 전혀 의심하지 않네요. 아, 호러는 빼고요… 그건 작가님이 너무 잘 쓰셔서 문제… (땀뻘뻘)
소설가에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 예전엔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막막해요. 예를 들어 어떤 작품은 문장이 간결하고 템포가 빠른 게 장점인 반면(〈지옥의 왕 전업주부〉가 그렇죠) 어떤 사람은 너무 장황해서 문제고요(바로 저처럼, 지금 이 글처럼). 보편적으로 통할 조언은 없는 것 같아요. 전에 저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한 가지 조언으로 “일단 써라”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쓰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찢어 버려도 그만이다, 일단 써라, 라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황석영 소설가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언젠가 내가 ‘문학에 뜻을 둔 아우에게’라는 산문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 이런 글이 나온다.
‘문학’이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두 팔로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고 들여다보고 있을 게 아니라 차라리 그녀를 떠나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그래서는 열심히 진정으로 너의 생을 살다보면 어느 결에 성숙해진 그녀가 네 등뒤에 다가와 너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릴 것이다. 나 아직도 네 곁에 서서 멀리가지 않고 지키고 있었어, 라고.
황석영,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근데, 맞는 말 같더라고요. 경험이 인간을 성숙시키고, 성숙한 인격은 글에 반영되는 법이라서, 어떤 사람에게 소설가로서 필요한 것은 글쓰기 훈련이 아니라 경험 쌓기일 수도 있겠죠. 책상 앞에서 물러나 작문 아닌 다른 것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답인 사람도 있겠죠. 그래서 저는 이제 소설 쓰겠다는 사람 누구에게든 통할 조언 같은 것은 다 잃어버렸어요. 하지만 한애선 작가님께 드릴 말씀은 있죠. 자신을 믿고 계속 쓰시라는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많이 놀랐어요. 완성형 작가다. 템포, 전개, 직접 체험과 배경 지식, 복선 회수,농담… 어떻게 이렇게 재밌게 쓰지? 어떻게 이런 사람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무명이고 별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연재하지? 그런데 10화까지 하고 어그러진 소설만 몇 개인지 모르겠다 쓰신 것을 보고 비로소 납득했어요. 이 정도 솜씨가 나오려면 당연히 그만한 인고의 수련이 있었던 것이구나. 그 어떤 위대한 영웅도 한때 갓난아기였듯이 그 어떤 사랑받는 소설가도 듣보잡 시절은 반드시 있는 것인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그거구나.
너무 심하게 비행기 태우는 것 같나요? 두고 봅시다. 계속 써 보시면 아시게 되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