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너무 노골적인가요? 하지만 진담입니다.
문녹주 작가님은 이 소설이 ‘여류 작가’의 것으로 분류된다면 학을 떼시겠지만, 여성 시인이라면 결국 여성시를 해야 하고, 여성 문인이라면 결국 여성 문학을 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조금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여성시를 하지 않고 여성 문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는 아직 안 왔어요. 미안해요. 비명 지르지 말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채희정이라는 인물이 벗어난 전형성 때문에 이 소설이 전복적일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희정은 도망가버렸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려서 되먹지 못하고 비열하고 폭력적인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소비하는가에 관한 전형성에서요.
이 여자는 굳이 따지자면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리고 싶어서 눈을 희번득거리며 돌아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런 욕망에 노골적이고, 숨기려는 시도도 별로 없어요. 혁진에 관한 진실(로 보이는 매우 설득적인 정황)을 알게 된 희정은 펑펑 웁니다. 인간답고 마땅히 연민을 가져야 할 상대에 관한 마음도 있지만, 속은 게 분해 죽겠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속은 게 분해서 폭력적인 복수를 꿈꾸는 종류의 심리적 정황 역시, 너무나 ‘인간다운’ 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인간답기 때문에, 전형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버리죠. 비꼬는 표현 맞아요.
가장 감탄한 부분은 깔끔한 살인 트릭입니다. 비슷한 종류의 연쇄 살인이 잔뜩 등장하는 스릴러를 쓰고 싶을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감시기술이 발전한 최첨단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겁니다. 수사 기관 전문가가 봤을 때 한숨이 좀 나올 정도의 논리적 트릭을 구상하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거든요. 특히나 비전형적인 프로파일의 강력 범죄자가 일상에서 ‘사적으로 보이는’ 동기로 살인을 하려고 한다면, 제약이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에서는 그런 고민을 깔끔하고 상쾌하게 끝내 버립니다. 제 속이 다 시원해지죠.
채희정이라는 인물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욕망에 비추자면 이 소설엔 반전도 없고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그는 그냥 집요하게 쟁취해내는, 여자 입니다. 그래서 재밌는 거죠.
문녹주 작가님이 거부하고 떼를 써봐도 계속 ‘여성’ ‘서사’ 작가님으로 불릴 수 밖에 없겠습니다. 이렇게 ‘너무나 인간다워서’ ‘여성스럽지 못한’ 여자 얘기를 계속 하고 싶어 하신다면요. 미안해요. 당신이 여성 문학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대는 아직 안 왔어요. 저 역시 유감입니다만, 이렇게 재미있는 여성 인물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의 업보라고 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