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좀비나 괴물이 등장하는 창작물의 붐은 비단 2016년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을 시발점으로 두지 않더라도 언젠가 예견된 일인 양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지속해서 사랑받는 장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좀비물’은 다양한 장르에 굵직한 갈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좀비물의 뿌리라고 불릴 수 있는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은 다양한 갈래로 그 제목이 패러디되어 왔다. (경희 작가의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이나 백곶감 작가의 〈살아있는 오이들의 밤〉 등 브릿G에도 이에 관한 작품이 여럿 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코코아드림 작가의 소설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이라는 작품 제목을 마주했을 때, 완전히 낯선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좀비에 대해 이야기하겠구나. 낮이라고 했으니 시간적 배경이나 이면적 배경이 어둡지는 않겠구나. 그리고 작가의 단편을 읽었던 과거의 기억에서 기인한 한 가지 확신은 ‘이 작품이 절대 지루하지는 않겠구나’였다. 코코아드림 작가는 이미 수많은 괴담과 호러,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기에 독자로서 중간 이상의 기대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러면 실망도 큰 법이기에, 나름 조심스럽게 작품의 첫 회차를 읽었다.
그런 나를 환영이라도 하듯, 이 소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향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한국형 좀비물의 한 페이지에서
앞서 언급한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은 한국 특유의 사회적 일면을 좀비와 결합하여 일종의 ‘한국형 좀비물’이라는 장르의 대중화를 가져온 데에 일정 분량 기여했다. 그 이후 특별히 한국의 과거, 현재, 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이 쏟아졌다. 역사물로서의 좀비를 다룬 〈킹덤〉과 영화 〈반도〉, 가장 최근의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까지 수많은 한국형 좀비와 이물이 탄생했고 문학 역시 이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 이전보다 거침이 없어졌다. 심너울 작가는 단편소설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1에서는 지옥의 출퇴근을 좀비의 등장으로 설명했으며, 정세랑 작가의 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2에도 ‘구울’이라 불리는 이물 아이가 등장한다. 남유하 작가의 단편 「다이웰 주식회사」3에 등장하는 ACAS(후천성 심정지 증후군) 역시 ‘좀비’ 형태의 인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갈래의 해석 가운데 지지하고 싶은 것은 좀비가 ‘극한’의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좀비는 여타의 이물과 달리 그 외형이 인간을 닮았고,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좀비 바이러스’라는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질병으로서의 전염’과 ‘대형 인재(人災)’를 동시에 다룰 가능성을 연다. 몇몇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인간과 좀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나 ‘반은 인간, 반은 괴물’이라는 특수한 인물형을 내놓기도 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의 결말에는 서겸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는 상황이 등장한다. 이처럼 좀비가 되었을지 모르는 인간, 인간일지도 모르는 좀비 캐릭터는 한 집단을 뒤흔들 만한 질문을 던지는 중요한 기재로 작용한다.
‘저 사람을 우리 공동체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한국은 유달리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의 여러 나라가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뒤흔들 수 있는 작은 의심이나 균열은 결국 가정과 도시,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결정타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극한’이 되어 개인주의와 의심증을 만들고 결국,─한국에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몇몇 이들에게 ‘종말’로 여겨지므로─종말론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유난히 우리나라의 좀비 아포칼립스나 거대 재난 영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종말론자’이거나 ‘교주형 인물’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여전히 누군가에겐 공동체의 종말이 개인의 종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김현숙 집사의 등장은 극한의 상황에서 등장할 수 있는 몇몇 인물군 중 하나를 가리킨다. 작은 백화점 안에서, 누가 좀비일지 모르는 심각한 공기를 읽지 못하고, 정체불명의 종교를 설파하는 이는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지독히 현실적이다. 종말을 맞을 것 같은 대재앙 안에서 사람들을 쥐고 흔들며, 때로 결집하는 것은 이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좀비물은 이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장르이며 그 안에서 ‘인간으로 인한’ 재난과 종교는 독특한 유기성을 갖는다. 현재 바이러스의 팬데믹 안에서 이는 더욱 시의성을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인물은 ‘유튜버’이다. 최근 1인 크리에이터의 등장으로 급격히 다양한 작품에서 유튜버를 직업으로 하는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전혜진 작가의 「백 번째 촛불이 꺼질 때」4 등) 하나의 특종을 잡으면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점, 공통적인 관심사를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늘려간다는 점이 유튜버의 활발한 등장을 가능케 했다. 장르 소설에서 유튜버의 등장은 빈번하다. ‘분명하고 자극적인 사건’을 다루어야 하는 이야기일수록 그러하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재난 중의 재난이므로, 유튜버 중 ‘특종’에 혈안이 된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저 좋은 ‘소재’로 여겨질 수 있다.
이전에 재난을 지나치게 파헤치려는 ‘기자’ 캐릭터가 최근 ‘유튜버’로 변모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현실에서도 다양하게 발생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이슈에서 유튜버가 그것을 취재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에는 과열된 소수 유튜버의 욕심이 낳는 여러 문제점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생사를 다투는 ‘재난’을 일종의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는 점에서 현실과 동일하게 그들은 종종 부정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 작품의 ‘나진’이 그러한 인물이다. 나진은 ‘JJIN’이라는 이름의 유튜버로 활동하며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을 통해 영상의 조회 수를 높이고자 한다. 조용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집중하며 동생을 이용하고 때로 소리를 크게 높이며 위기 상황을 조성한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얼마 되지도 않지만, 영상을 찍는 데에 열을 올리는 그의 행동은 미스터리로 남지만, 전대미문의 재난에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나진이 소설의 끝까지 ‘알 수 없는 캐릭터’로 남는 것은 소설에 하자가 되지 않는다.
나진이 마냥 불투명한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반드시 재난 상황에 한 명쯤은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도 존재하는, 다수의 고통을 무시하고 재앙을 통해 자신의 유명세를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나진의 유튜브 구독자가 대단히 많고 유명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유튜버가 재난 상황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도 재미있는 진행이 될 것이다. 그 안에서 스스로의 이기심을 보인다면 나름대로 반전을 줄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를 잠시 다룬 도입부나, 실험실 역시 흥미로운 공간적 요소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통해 살펴보자.
보다 흥미로운, 광대한 이야기를 위하여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감상은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사실 장르 소설은 장면성이 뚜렷한 작품들이 많아 시나리오로 변환하고 만화나 영화로 재창작되기 용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은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떠나더라도 확실한 영상처럼 각각의 상황과 인물의 시각적 움직임이 뚜렷하다. 또한, 특별한 시공간적 변환이 없더라도, 플롯을 자르고 붙이는 변형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특히 영상물을 위한) 시나리오처럼 쓰인 소설이다.
작품의 공간은 독특하게 시간과 함께 분리된다. 일제강점기의 한 섬과 2000년대 초반의 학교에서 벌어진 총격, 그리고 2018년의 서울. 이 세 공간은 각각의 안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상당히 넓게 분포한다. 또한, 베일에 싸인 채 드러나지 않은 뒷이야기 역시 상당히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글의 초반에는 ‘독립운동자금’ 이외에 역사적 배경을 알리는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시간적 배경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 시대의 섬에서 사람들이 몰려 있는 아수라장에 등장하기 좋은 장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제강점기는 ‘일본’과 ‘한국’을 가해국과 피해국으로 나누는 시기였다. 하지만 인간이 좀비가 되는 순간, 이런 위계와 억압이 의미를 잃는다. 일본군과 조선의 백성이 한곳에서 살아있는 시체가 된 채 뒹구는 것을 보며 조선의 독립운동가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저렇게 별것 없는 껍데기를 가진 자들끼리 점령하고 점령당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한탄 섞인 숨을 뱉을지 모른다. 재난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을 통해 그 안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장치를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히 다루는 장면들이 전반부에 조금 더 삽입되면 풍성하고 단단한 느낌을 줄 수 있다.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은 비교적 잘 표현되었다. 학교라는 작은 공간을 묘사해서인지 특별히 치밀하지 못한 부분도 없었고 장면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생존자를 죽이는 억압적인 군인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폭력적인 일면을 잘 보여주었다. 2018년의 서울도 마찬가지이다. ‘독립운동가-피해자-피험자’로 이어지며 ‘같은 층위’를 형성하는 촘촘한 인물의 고리가 연결된다. 하나의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공유하는 재난으로서의 고통에 정서와 연대는 이러한 방법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좀비가 이렇게 많아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연작 소설의 도입부처럼 보인다. 세계관을 표면적으로 훑는 느낌은 이야기를 넓은 범위에서 보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깊이에 있는 이면적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아쉬움을 줄 수 있다. 바이러스의 정체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해소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서두에 언급한 영화 〈부산행〉처럼 좀비 ‘바이러스’라는 것이 존재하다 보니 좀비 아포칼립스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한 재앙으로 종종 묘사된다. 사람의 욕심과 비뚤어진 과학의 발전을 도모하는 이들이 내놓은 최악의 결과가 좀비 바이러스가 되는 일은 여러 작품에서 자주 언급된다. 그런 사례들을 면밀히 참고해서 ‘바이러스의 근원’에 대한 내용을 채워준다면 독자들의 깊은 궁금증이 해소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진과 나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둘에 대한 정보는 ‘어머니가 다르며’, ‘불륜 관계를 통해 어쩔 수 없이 함게 살게 된’ 처지라는 것이 전부이다. 나진과 나원의 관계 역시 그 뒷이야기로만 하나의 작은 단편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독자 스스로 그 둘의 관계에 대해 상상하는 것 역시 흥미로울 테지만, 작가가 풀어주는, 내용에 기반한 나원과 나진의 이야기 역시 독자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
극한의 인간성을 반영하는 소설
우리는 지금 극한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김없이 이기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분포한다. 확실한 것은 ‘재앙’이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인간상이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기사와 사건이 쏟아내는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모든 일’은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의 인간 군상과 다를 바 없다. 극한의 인간성이란 비단 세계를 벌벌 떨게 하는 좀비들이 세상을 배회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이곳저곳에서 재앙이 목격되는 지금, 우리는 매일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을 헤치며 살아가고 있다.
전대미문의 것은 아니더라도, 매일의 작은 재앙을 통과하며, 우리는 정말 서로가 좀비는 아닐 것이라 믿으며 산다. 백화점에 갇혀 한정된 식량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한정된 자원’으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타인에 대한 의식과 염려 속에 살아가는 와중에도 유튜버와 아이들, 종교인 그리고 교장이 있다. 남을 이끌려는 자와 이끌려가는 자가 있고, 전도하려는 자와 신을 혐오하는 자가 있다. 부상입는 자가 있고, 그것을 방치하는 자와 연대하는 자가 공존하는 지금, 나는 어느 즈음에 서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느 즈음에 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