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약 작가는 첫 장편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작품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무척 궁금했다. 문득, 갑자기 그의 작품이 다시 궁금해져 작가 페이지를 찾았고 최근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발견한 단편이 〈머리에 버섯이 났어요.〉였다. 역시, 제목부터 작가 특유의 신비한 느낌이 묻어났다. 머리에서 버섯이 난다는 제목이 흥미로워 보였다. 첫 문단을 읽어본 후, 끝까지 보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문장과 이야기 흐름의 구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었고, 새로운 작품이 반가웠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떠나서 내가 이 작품을 전부 읽게 된 까닭은 아마도 다른 데에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내 머리에서 버섯이 자라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과 진행의 성장
파란약 작가의 첫 작품이자 장편인 《거울문자》는 충분히 좋은 이야기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문장과 진행에 있어 보완점이 보였기에 다음 작품을 눈여겨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여러 작품을 쓴 후,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의 구성력은 눈에 띌 정도의 성장을 보였다. 또한, 〈머리에 버섯이 났어요.〉는 첫 작품과 다른 새로운 방식의 표현을 사용했다. 장편과 단편은 그 구조적인 면에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파란약 작가는 이 단편을 통해 글의 구조를 이용하는 데에 새로운 장점을 드러냈다.
먼저 글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 문장이 끝나는 곳마다 행갈이가 되어있어 글이 굉장히 파편적으로 읽힌다. ‘파편적’이라는 말은 유기적인 구성이 중요한 글에서는 치명적 단점으로 여겨지는 일종의 오류이지만, 이 작품에서만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소설의 주된 소재로 쓰이는 ‘버섯’과 그것을 번식시키는 ‘포자’가 날아다닌다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포자는 입자의 모양을 띠고 있으며 소설에서 묘사되듯 “하얀 가루가 피어오”르는 형태로 공기 중에 퍼진다. 이보다 ‘파편적’인 번식 방식을 가진 식물이 어디 있을까.
작가가 의도한 행갈이는 문장에 ‘포자’와 같은 특성을 부여한다. 한 문장과 다른 문장이 이어지거나 밀접한 관련성을 갖지 않고 끊겨 읽히는 것은 한 가루가 다른 가루와 멀리 떨어져 날아가는 포자와 닮았다. 또한 이것은 아이의 생각이 다소 중구난방인 점과도 닮아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한 군데로 모이지 않는다. 결국 작가는 문장의 파편성으로 하여금 버섯의 ‘포자’, 그리고 ‘아이의 특성’과 의도적으로 형태적 연관성을 갖도록 했다.
이야기의 덩어리를 나누는 데에 사용된 “!@#$%^&*?”라는 기호 역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분할선이나 별표와는 다른 의미 단위를 지닌다. 위와 같은 복잡한 기호는 만화적 특징을 띠며, 흔히 한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을 때나 복잡한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 사용되곤 했다. 이 두 상황의 공통점은 ‘단절’이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할 수 없거나,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단절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기호가 나누는 이야기의 단위를 보며 아이가 타인과의 의사소통, 특히 아버지와의 소통에 있어 단절감을 경험했다는 것을 심리적으로 감지해 낼 수 있다.
위의 기호를 조금 더 의미 있게 활용하고 싶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10개로 나뉜 소설의 앞쪽에 기호를 쓸 때마다 하나씩 그 개수를 늘려가는 것은 좋은 활용 방향이 될 수 있다. 첫 문단에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를 사용했다면 그다음에는 “!@”, “!@#” 등으로 개수를 하나씩 늘려가는 방법은 이 기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점점 다른 이들과 결합하며 세상과 멀어지는 느낌이다. 점층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타인과 결합하는 동시에 기존의 세계에서 분리되기 위한 시도를 하는 아이를 기호의 활용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사용한 기호의 활용도 굉장히 좋았다.
파란약 작가의 이런 구조적 의도는 상당히 참신했다. 모든 문장을 행갈이 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기호를 활용하고 ‘헤헤헤’라는 웃음소리를 가루처럼 화면에 흩뿌리듯이 표현하는 것들은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과도 잘 들어맞는다. 이런 형식적 실험은 작가의 특기인 듯하며 앞으로 발전시킨다면 작품을 쓰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글 자체의 형태적 변형은 독자가 느끼기에 시각적으로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흐름의 변화보다 때로는 시각적인 효과가 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장점과 문장의 특징을 잘 살린다면 작가의 독특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지속적인 유입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폭신한 버섯에 안겨
파란약 작가는 단편의 진행에서 매력을 보인다. 물론 장편 역시 나름의 재미를 갖지만, 단편은 신선한 실험을 하기에 적합하다. 장편의 구성력에 있었던 가능성이 단편에서도 느껴졌다. 처음-중간-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전보다 훨씬 걸림이 없으며 내용 또한 흥미로운 상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버섯이 서로 엉겨 붙듯, 거대한 하나의 슬픔이 아련한 기쁨으로 뒤바뀌는 지점에서 독자는 작품을 읽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은 전혀 가볍지 않다. 아빠로부터의 가정폭력과 “옷을 다 벗고 모르는 아저씨랑 같이 있”는 엄마를 마주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아주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사방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거대한 폭력을 아이는 자신의 시선으로 흡수해 독자에게 보인다. 거친 숨을 내쉬는 엄마와 아저씨가 “뭘 하는 걸까요?”라고 질문하는 천진함 속에서 독자들은 날카로운 폭력의 충격을 덜어낼 수 있다. 소설의 화자를 아이로 설정한다는 것은 이렇듯 ‘완충’의 역할을 한다. 날카로운 화살을 온몸으로 맞고도 그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화자를 독자들은 보호해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작품에 조금씩 다가가 와락, 어린 화자를 안아주는 순간, 독자들은 일면 자신이 화자와 일체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날아왔던 어떤 폭력의 실체를 기억해내게 된다.
이렇게 독자가 무방비상태로 작품에 흡수되는 과정은 괴로움을 수반한다. 화자와 일체가 되어 자신이 내몰렸던 다른 폭력의 진면을 마주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위로’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아이로서의 화자가 아닌 또 하나의 완충재를 준비한다. 바로 ‘버섯’이다.
머리에 버섯이 자란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톡 건드리면 하얀 가루가 나오는 이 작고 귀여운 버섯은 똑똑하고 착하다. 세상의 폭력을 감싸 안고 스스로 폭신한 위로가 된다. 말로 하는 위로가 범람하는 지금의 가벼운 언어들 사이에서 행위로서의 다독임은 무엇보다 큰 울림을 준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욕지거리를 뱉다가도 금세 ‘헤헤’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버섯에 안기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작가가 작품에 녹여낸 하나의 연대 안에서 그저 편안히 몸을 녹이고 있을 것이다.
〈머리에 버섯이 났어요〉는 이렇듯 어린 화자와 버섯을 통해 독자를 폭력에 내모는 동시에 그 안에서 위로한다. 맨몸으로 내몰린 차가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독자에게 어린 화자가 내미는 손을 잡아보자. 천진한 얼굴로 내미는 아이의 진심을 느껴보자. 온몸으로, 무방비의 상태로.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하나의 세상에서, 그곳에 편입되지 못한 채 외따로 울고 있는 나에게 아이는 마지막으로 말을 건다.
“자. 내 손을 잡아요.”
파란약 작가가 내미는 위로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가 작품을 읽는 이 자리에서 포자처럼 퍼지는 위로가 온몸을 감싸는 감각은 부드럽고 동시에 따뜻하다. 추상적이고 가벼워져만 가는 이 ‘위로’라는 것의 실체를 보고, 냄새 맡고, 끝내 그것과 결합하게 하는 이 착한 소설은 끊어진 문장과 단어들 사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상처를 포용한다.
나는 작가의 이 착한 마음을 있는 힘껏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저 방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소설의 문장을 읽고, 만지고, 곱씹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든, 그것이 내가 걷잡을 수 없는 폭력에 그저 힘없이 맞서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이 감정을 느끼길 바라기에, 오늘은 조금 더 힘을 내서 긴 문장들을 적었다.
이 소설의 밀도는 매우 헐겁다. 더 많은 이들에게 퍼져야 하기 때문이다. 포자처럼, 여기저기에 뿌리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버섯처럼, 폭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손을, 세상을 향해 뻗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나를 향해 손 내밀지 않는 이곳에서 거대한 하나의 ‘버섯’을 만들어낸 아이가 다가오고 있다.
비릿하고 폭신한, 어느 방향으로도 날카롭지 않은 이 식물에 나를 온전히 맡길 준비가 되었다.
드디어, 내 머리에서도 버섯이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