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사이에 남겨진 사람들
작품의 제목을 접하는 순간부터 죽은 이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남겨진 사람들’이란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는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삶과 죽음 사이에 남겨진 이들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곧 ‘나’와 예원누나, 도영이형, 희은을 의미하는데, 사실 희은은 너무 어려 자신의 엄마인 예서가 죽은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물이므로 논외로 하고자 한다.
남겨진 인물들은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원은 필사적으로 슬픔을 억누르고 있으며, 도영은 겉으로는 예서의 죽음을 극복하고 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각본을 맡은 연극을 통해 언제나 삶과 죽음 사이의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나는 남겨진 셋 중에서 슬픔이나 죽음에 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마치 예원과 예서, 도영은 연극의 주연배우들이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인 것처럼.
작중 화자와 다른 인물들간의 거리감
앞서 작중에 등장하는 ‘나'(이하 화자)는 이 이야기의 관객의 위치인 것 같이 느껴진다고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자는 6년 전 연극 동아리에 속해 있었을 때부터 겉도는 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들어온 도영은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심지어 화자가 쓴 이야기의 결말부를 바꿔놓기까지 했다. 이는 화자에게 다시는 이야기를 쓰지 못하게 할 만큼 큰 상처로 남았으며, 예원과 도영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환멸
다른 인물들과는 어쩐지 거리감이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화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그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죄책감과 환멸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예서의 죽음에서 도망쳐 남겨졌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려 하는 주인공을 통해 도리어 깊이 상실과 남겨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뛰어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예원, 예서, 도영이 아닌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데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다고 본다. 물론 아니라면 조금 머쓱하겠지만, 적어도 리뷰를 하려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어쨌든 화자가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그의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환멸은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작년에 죽은 강아지 해피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는 것에서도 그는 애써 죽음과 자신을 격리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예서와 해피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환멸한다. 그는 예원이나 도영에게는 있는 뭔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예서의 죽음에서 큰 충격을 받았기에, 누구보다도 그녀를 잊지 못했기에 더욱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인다.
남겨진 삶을 살아가는 방식
이 작품에서 예서의 죽음 자체는 큰 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떠나가고 난 후 남겨진 인물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 보인다. 사람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은 한 번 포기하면 당사자에게는 큰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당사자의 주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예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거운 슬픔을, 도영은 언제 죽음을 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둘을 차치한다 해도 화자도 마찬가지로 남겨진 삶을 살아간다. 비록 관객인 양 도망치려 하지만, 매년 겨울 예원을 따라 납골당에 방문했던 것만 봐도 그는 나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기에 나름대로 예원과 함께 예서를 보러 가는 행위로 속죄를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독자는 예원과 도영을, 화자를 쉽사리 탓할 수 없게 된다. 남겨진 사람들은 결국 제각기 고통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원, 도영과 화자처럼 우리도 만약 남겨지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겨지게 되면 여생 동안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괴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지는 순전히 남겨진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