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르타 작가의 소설에서 보이는 가장 큰 장점은 ‘분명함’이다. 장면의 굵직함과 그 안에 조밀하게 들어찬 다양한 색을 보는 것이 작가의 작품을 찾는 이유다. 어떤 세상에 어떤 인물이 던져지더라도 우리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는 결국 무엇으로 끝을 맺는지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아무래도 그가 가는 길을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중도하차는 불가능이다. 곱씹을수록 멋진 여행과 지루하지 않은 시간들이 소설의 결말부에서 여운으로 남는다.
이 소설은 하나의 어이없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파타고니아 환상특급>은 소설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에세이를 써야 했던, 아니 그 이전에 한 사람의 일생을 마무리하는 과제를 얼떨결에 떠안은 주인공이 이리저리 떠돈 궤적이다. 내가 아는 기린은 이제껏 두 가지였으나 오늘로 세 가지가 될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전설의 동물 기린, 그리고 목이 길어 슬픈 얼룩무늬 기린.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날 운명을 마주한 우리의 주인공 윤기린.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살면서 원하는 일을 기꺼이 하는 상황보다는 원치 않는 과제을 억지로 해야 하는 시간들이 훨씬 많다. 우리는 삶의 갈래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으며 몸으로 그것을 체험한다. 제멋대로 잔뜩 엉긴 일들을 정돈하는 것은 늘 귀찮게만 보인다. 그러나 이건 어떨까. 한순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야만 하는 의뢰를 받는다면. 그 모든 일이 상상치 못한 상황과 이유가 맞물린 결과로 발생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디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까. 일방적으로나마 아는 사람이라고는 서로 일면식 없는 유명 영화감독밖에 없는 낯선 나라에서 기린이라는 사연 많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보내는 시간은 그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소설의 처음에서 기린을 찾아온 출판사 관계자는 그에게 대뜸 이렇게 질문한다.
“혹시 트위터 아이디 양갈레펜촉 맞으세요?”
작가 계정도 아닌 일반 계정, 거기에 올라온 짧은 글로 인해 윤기린은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생애 마지막 소원, 어쩌면 사후 첫 번째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 전에, 기린은 이 여행을 얼마나 원했을까. 그는 Y출판사의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작가 계정은 출판사측에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실망한다. 심지어 그는 스페인에 다녀온 이후에 “여행기”를 출간할 것을 제안받는다. 다수의 소설 투고를 깔끔히 배제하고 여행 이후의 에세이에 눈독을 들이는 출판사와 기린의 이해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다.
원치 않았던 여행을 억지로 가야 했던 기린을 이끈 것은 오직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의 소원뿐이었다. 바다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는 그의 선택은 미심쩍었지만, 기린이 스페인으로 떠날 동기를 마련해 준다.
흥미롭게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원치 않는 여행’을 떠난 주인공들은 수도 없는 이야기 속에 존재했다. 영문도 모르고, 때로는 극렬히 반대했던 여정을 떠나야 했던 이들은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마치고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오며 일종의 변화를 겪는다. <파타고니아 환상특급>은 느슨한 회귀가 소설의 흐름을 정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안에서 분명한 변화를 겪는다. 작가의 유령을 만나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작가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알아가는 주인공 윤기린의 여행기의 끝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상상하며 소설을 읽어내려갔다.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 인물들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흥미는 ‘이름’에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소설에 걸맞는 주인공의 이름이 존재할 수 있을까. ‘기린’은 우리나라에서 살기엔 너무나 사연이 많을 이름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놀림은 따놓은 것이며 종종 짓궂은 아이들에게는 더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것이다. 기린은 아마도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겨루는 경연 프로그램이 있다면 상위권에 들 법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 안에는 ‘전설의 동물’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기린은 바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이물이다.
“나는 휴대폰 잠금화면에 저장된 조선시대의 민화를 보여주었다. 오색찬란한 빛깔의 털로 덮인 사슴 몸을 하고 용을 닮은 머리의 이마에는 기다란 외뿔이 돋아 있으며 말의 발굽과 갈기 그리고 소의 꼬리를 가진 신수(神獸).”
그런 기린에게 루이스 세풀베다의 영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기린과 세풀베다의 영혼이 만나는 장면에서는 오메르타 작가 특유의 위트가 돋보인다. 서로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마테’의 요정이라느니 하는 기린의 농담 어린 진담은 유머러스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이 스페인, 칠레, 파라과이 등이라 그런지 작품의 색을 정하는 분위기는 역시 이국적이다. 살면서 꽤 많이 들어본 이름인 ‘마테차’ 역시 편의점에 천몇백 원에 파는 음료보다는 훨씬 귀해 보이고 ‘예르바 마테’와 ‘봄비야’ 등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기구들도 기린이 있는 곳이 색다른 외국이라는 느낌을 선명하게 준다. 커피를 처음부터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마테차 역시 길들여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소설가의 영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따스함과 푸근함이 배어 나오는 반투명한 형체가 내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의 영혼에서는 마테차 향기가 나려나.
기린이 여행 도중에 만난 이들 중 ‘레띠시아’는 영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린이 도움을 요청할 때 적절히 나타나 자신의 개인적인 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땅에서 영혼이 느껴지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하며 세풀베다의 장례를 함께 치러 주던 레띠시아에게는 어떤 뒷이야기가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어쩌다 영혼을 보게 되었을까.
레띠시아라는 인물이 기린과 함께 여행의 끝까지 가는 과정을 상상하기도 했다. CIA가 쫓아오던 마지막 장면에서 레띠시아가 신묘한 힘을 발휘해서 그들을 물리치는 장면도 머리에 떠올랐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상당히 여운이 오래 남는다. 만약 작가에게 레띠시아라는 인물에 대한 추가적인 설정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여정에 대해
오메르타 작가의 소설에서 ‘여행’을 다룬 작품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페인에 작가가 다녀온 경험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해당 국가의 차 문화나 색채에 대해 분명한 시선으로 써 내려갔다. 작가가 ‘여정’의 묘사에서 장점을 보이고 있기에 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여정을 다루는 소설은 그 흐름의 큰 줄기를 잡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중도에 다른 방향으로 새거나 옆구리가 툭 터진 김밥처럼 인물이 곁가지로 새지 않는다. 기린의 여정으로 보았을 때 특별한 의미 없이 다른 곳에 들르거나 소모한 시간이 없다는 점이 좋았다. 깔끔하게 세풀베다 작가의 장례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부드럽게 읽혔다. 바다에서 파라과이로 방향을 바꾸자는 세풀베다 작가의 말이 조금은 소설의 방향을 급하게 트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그만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바다’에서 ‘숲’으로 완전히 그 배경이 달라졌음에도 전혀 이질감이 없이 끝까지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도 그에 대한 이유를 부여한 오메르타 작가의 재치가 돋보였다.
여정에서 만난 자연물들과 세풀베다 작가의 교감이 더 다양했으면 보다 신비로운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령으로 존재하기 이전부터 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그는 많은 동물들을 만났을 것이다. 또한 영혼이 된 이후에는 그들과 더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그것을 벗어던지고 나서 다른 존재와의 소통이 열리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추가적인 장면을 넣지 않아도 <파타고니아 환상특급>을 통해 떠난 여행은 썩 마음에 들었다.
소설의 마지막은 기린의 또다른 여행을 암시한다.
글쎄, 결말을 보며 이 작품의 후속편을 보고 싶은 것이 비단 나에게만 느껴지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신수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의 여정에는 이국적인 색채와 유령의 신비함이 함께했다. 기이한 심부름을 따라가는 여정에는 다양한 사람과 현상의 만남이 있었으며 눈길을 사로잡는 재미가 서린 대화는 이미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굽이치는 강물과 떨어지는 폭포처럼 변화되는 주인공의 짧은 여행처럼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역시 독특한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들을 잘 조합하여 만든 소설인 것 같다.
앞으로의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오메르타 작가의 소설 속에서 또 어떤 인물이 어떤 여행을 떠날까. 소설은 하나의 여행이며 작가는 인물을 멀리 심부름 보내는 영혼이다.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던 기린처럼, 이유를 알지 못하고 소설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 인물들의 좌충우돌이 결국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말이다. 자신을 그런 곳에 던져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을지도 모를 인물들의 삶을 작가는 그저 엮어갈 뿐이다.
인물을 엮는 오메르타 작가의 방식을 사랑한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인물과 세계를 보는 애정어린 시선이 보이기 때문이다. <파타고니아 환상특급> 역시 마찬가지다. 기린이 남긴 자취를 따라 여행을 떠나고 오면 하나의 여행기를 읽은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 사람들과 어긋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여행들이 시작된다면 언제든 동참할 것이다.
아. 그 길에 마테차를 좋아하는 작가의 유령이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