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스트 아포칼립스, 지구 종말에 대한 글이라고 하면 영화화되어 2편까지 나온 <메이즈 러너>가 떠오르네요. 영화로는 <매드맥스> 나 <나는 전설이다>가 생각나고요. <나는 전설이다>를 보고 난 뒤에 다시는 종말에 관한 글은 읽지 말아야지 생각했을 정도로 암울했었는데 영화에서는 다행히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서 다시 조금씩이나마 보기 시작했습니다. 음. 개인적으로 <메이즈 러너>도 영화에서는 책보다 분위기가 좋게 끝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마지막 남은 인류라면 희망이 보이는 편이 좋을테니까요.
<파라미터O>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인류가 특수 시설에 들어간 것이 먼저였을까요. 아니면 남은 인류에게 불임 선언이 내려진게 먼저였을까요? 어쨌거나 몇 안되는 인류는 생존을 담보해줄 특수 시설에 들어갔고 그나마 태어난 아이들마저도 장애를 가진채로 태어났기에 더이상 인류가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대를 이어나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낙인이 찍힌 채로도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그렸기에 같이 고민할 여지가 있었죠. 만약 제가 선택을 해야한다면 지호가 될 것인가, 조슈가 될 것인가, 게이브가 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숀 존이 될 것인가.
2.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시중을 들어줄 기계종이 존재합니다.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난 아이들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직접 돌보지 않아도 됩니다. 식당에 가지 않아도 음식을 날라다 줍니다. 이런 기타 잡다한 문제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에 사람들의 시간은 점점 남아돌게 됩니다. 남는 시간을 의사 ‘지호’가 개발한 쾌감기 안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간신히 유지 될 정도로만 생산되는 음식을 연애나 성생활에 쓰는 것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렇지만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특수 시설 내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관리하고 시설을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관리하는 엔지니어 ‘조슈’와 그의 조수 ‘엘라’에게는 예외를 뒀습니다. 쾌감기를 쓰려면 이들이 관리하는 전력이 필요하니까요.
처음 ‘조슈’가 이브를 데려왔을 때도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시설의 전반을 관리하는 조슈의 말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죠. 이브는 기존의 기계종들과는 다르게 자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창조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목사님에게는 이브는 악마의 인형이었지만요.
이브는 자아는 있지만 목표설정이 안된 상태였고 엔지니어인 조슈는 이브의 ‘파라미터O’를 일하기로 설정합니다. 이게 굉장히 편했던 점이 말이죠. 자아가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해야한다는 목표설정만 해둔 이브는 구형 기계종들과는 다르게 ‘알아서’ 일은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배고플 시간이 되면 알아서 음식을 가져다 준다던가, 충전을 위해 알아서 전력을 생산한다던가.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고 스스로 일을 하고, 게다가 시설 유지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해주고, 발견자인 조슈를 아이가 엄마 따르듯이 따르다보니 조슈도 이브에게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죠. 게다가 이브는 자손을 생산하기까지 하니까요.
소설 속에서 딱히 ‘불임’에 대해 극단적인 절망감을 느끼진 못했지만, 이브가 자손을 생산하는 건 이브에게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조슈에게는 놀랍고 기쁜일이었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됩니다. 이브의 자손 역시 자아가 있으며 그 자손이 자손을 생산 할 때마다 조금씩 환경에 맞춰 변화하고 개개인마다 개성이 존재하기에 이 쯤부터는 인간의 시대는 끝나고 기계종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적절치 못한 말은 아니겠네요.
3.
조슈와 기계종 이브의 관계, 조슈와 제자인 엘라의 관계가 위애서 아래를 향하는 포용과 따뜻함의 관계를 나타낸다면 의사인 지호와 목사인 게이브는 합의점을 도출 할 수 없는 극단의 대립관계를 내세우며 갈등을 유발합니다. 예를 들어 집단 내에 시간은 많고 희망은 없고, 임신의 가능성도 없는 상태라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지 충분히 상상이 가리라 믿습니다. 강간이 성행했고 지호는 해결책으로 ‘쾌감기’를 개발했습니다. 사람간의 성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정점만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인데, 정말 획기적으로 강간 현상이 줄었습니다.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쾌감기에 누워 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쾌감기는 효율적인 측면에서는 그만이지만 아마도 목사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교화되길 바랐을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인류가 모두 엘라 같았다면 목사님의 염원이 더 효과적이었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4.
사실 조슈에게는 남들에게 밝히지 못하는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따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뇌 전화기라고 부르는 장치를 통해 어머니는 시설 안에 있는 조슈에게 시설 밖의 세상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이 곳을 벗어난 어딘가에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은 조슈에게 아주 위안을 주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지호는 뇌 전화기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지체하지 않고 조슈를 불러서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와 연락이 끊기게 되고 2년 이상을 어머니를 찾는, 어머니가 보낸 신호나 증표를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지호에게는 상당히 답답한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 이 사실을 2년이 지난 후에야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줍니다. 이 부분은 작가님께 따로 문의 한 내용으로 갈음하겠습니다.
Ello : 그러니까 지호가 2년이나 기다렸다가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전한 것은 지호가 조슈를 사랑해서(부성애) 희망을 갖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견디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요? 지호는 조슈의 어머니를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고 조슈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가장 먼저 찾아줬죠. 그리고 마지막에 조슈를 구한 것으로 봤을 때도 지호가 아무리 냉정하고 쾌락만능주의라고 하더라도 조슈에게는 애틋한 부성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알렉산더 : 지호가 조슈에게 부성애를 느끼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보다 지호는 사실 처음부터 진실을 말해줄 의사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2년을 기다린 건 아닌거죠. 조슈가 어머니를 이렇게 계속 찾을 줄은 몰랐기에 2년이나 지난 후에야 거짓으로 ‘통화한 상대는 어머니가 아니라 허상이었다.’고 속였죠. 그렇지만 나중에 조슈가 어머니의 노트를 찾아오자 그제서야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말해 준 것으로 생각하시면 지호의 캐릭터가 일관성이 생길겁니다.
5.
이브에 대해서도 풀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자아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브는 시설 안 사람들이 안 최초의 자아가 있는 기계종입니다. 낯선 경험이지만 조슈는 이브와의 대화를 통해 이브가 가진 자아에 대해 알아갑니다. 결론적으로 이브의 자아는 생각 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아무런 교육이 되어있지 않은 최초의 순백의 상태라고나 할까요. 파라미터O에 일하기를 입력하면 알아서 일을 하고, 빈둥거리기를 입력하면 왜 일을 해야하는가를 궁금해 하는 정도지만 파라미터O에 아무 것도 입력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강아지나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이브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과 기계가 자아를 가지고 사람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경악스럽게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조슈는 위태롭게 중심을 잡고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저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해서인지 이브가 참 귀여웠지만 … 이브의 입수 경로와 이브의 형제와 이브의 자손들까지 이야기가 많으니 이브에 대해 궁금하다면 꼭 한 번은 읽어보시길 권하겠습니다. (곧 유료화 하신데요!)
덧) 제목을 중의적으로 지어봤습니다. 진짜로 인류의 끝엔 이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