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살 깎아먹기. 돌려막기. 가장 끔찍한 케이스를 생각해보라 하면 보통 주식이나 카드깡을 생각합니다. 오, 아뇨. 단언컨대 이곳에서 가장 끔찍하고 추악한 ‘제살 깎아먹기’와 ‘돌려막기’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마치 장편소설의 요약본 같습니다. 서사는 휙휙 지나가고 장면묘사는 짧습니다. 마치 영화 ‘라이트아웃’의 원안처럼, 모든 것이 숏테이크의 이어붙임입니다. 그렇기에 장면 사이의 어색함과 이질적인 감각이 조금 살아 있습니다.
그런 이질적임은 보통 단점일텐데, 제가 굳이 장점마냥 ‘살아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것을 장편으로 쓰면 그 누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오, 아니오. 심지어 이 작품은 후속작조차도 보기에 두렵습니다. 없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입니다. 인간이
좀비가
어지간한 호러 소설보다 이 단편의 마지막이 더욱 두렵습니다. 어떻게 마지막이 저렇게 될 수 있는지, 저기까지 어떻게 단번에 사고가 건너뛰어서 그 추악하고도 끔찍하고 공포스럽고도 충격적인 결과를 단번에 독자에게 꽂아넣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살 갉아먹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고, 그것으로 살을 빼며, 살을 뺀 것으로 인플루언서가 되어 돈을 벌고, 번 돈을 이제 지방을 뽑아내어 제 살 갉아먹는 것에도 만족하지 못해 위를 절제하는 세상. 위와 창자를 절제하는 수술이 단순히 더 날씬해지기 위한 성형외과 수술로 취급되는 세상. 그리고 제 살을 뽑아먹다, 남의 살점에 탐스럽게 침이 고이는 세상.
만약 인간세상에 정말로 좀비가 나타나게 된다면, 아마 이것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끔찍한 결과가 아닐까요. 사회는 대체 누구의 고혈을 짜 먹고 있느냐며 우리는 분개하지만, 정말로 고혈을 정말로 짜내어 정말로 먹는 이 세상은 정말로 두렵고도 공포스럽습니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본성인지, 혹은 이것을 부추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앞에 이질적인 감각이 살아있다고 했는데. 이쯤되면 그 이질감이 되려 의도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덕분에 어느정도 작품 내적인 내용의 전개에서 벗어나 조금 더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씁쓸하고도 짙게 속에서 올라오는 불쾌함에 결국 읽는 것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단언컨대, 이 사회의 추악한 쓴맛을 가장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이것을 꼽겠습니다. 하다못해 자신의 역겨운 지방마저도 바질향으로 만들어준다니, 사회는 이 끔찍함을 가속시키려 미친 것입니까?
작품의 말미처럼, 이런 세상이라면 차라리 멸망하는게 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