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일상의 회전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밤이 지나가고,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의 묘사가 길게 쓰여져 있습니다. 나날이 떠오르는 짜증과 권태를 오래토록 말하고 싶은 것 같군요.
그때였다.
드디어 병아리가 등장합니다. 어떤 모습일지요. 은행나무, 병아리, 옥수수로 이어지는 노랑은 온기가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표현들이라 잘 읽혔습니다. 심장-강낭콩도 그랬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닭은 ‘병아리’입니다. 좀이 쑤셔 계란판을 빠져나왔고, 비좁은 달걀세상이 불쾌해 부수고 나와버렸죠. 이 야망있는 병아리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 방황하는 청소년 쯤으로 획일화됩니다. 아이는 꼰대같은 말을 하며, 어른들이 일하는 곳을 소개시키죠. 경쟁하는 생닭들과, 후라이드-양념 논쟁. 가장 끔찍한 것은 멋진 외형에 홀려 양념치킨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병아리의 모습입니다.
확실하다. 이 병아리는 부쩍부쩍 자라고 있다.
병아리는 성장합니다. 더 이상 귀엽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말합니다. 천천히 커도 되는데. 아이는 소위 ‘어른’ 들이 할 만한 ‘조언’ 들을 한바탕 쏱아냅니다. 아이도 이 대사들이 유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병아리가 들을 리 없죠.
트럭 청년은 품종과 태생,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합니다. 병아리는 크게 충격을 받았고, 닭강정 가게의 이야기를 듣죠. 우울해진 병아리에게, 대신 널 길러주겠다는 아이의 말은 매우 수치스러웠을테죠.
그리고 닭강정. 닭의 삶에서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멋진 양념치킨을 흉내내고, 자기들끼리는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듯 묘사됩니다. 로스트 치킨의 엘리트 닭도 부럽지 않다지만. 병아리와 아이는 떠납니다. 곧바로 마주친 번지르르한 로스트 치킨과 비교됩니다.
후회하는 병아리. 하찮은 비둘기를 보며 자신의 앞날을 걱정합니다. 갑자기 등장한 배불뚝이 아저씨는 파닭이야길 꺼내며 자기 삶을 살라는 조언을 합니다. 병아리와 아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병아리와 아이는 헤어지고, 각자의 길을 향합니다. 해가 기울어 갑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어떤 이야기들을 하기에 앞서, 전체적으로 표현들이 지나치게 현학적입니다. 가끔 세련된 비유나 기교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어디선가 훔쳐온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해는 반드시 쨍쨍 내리쫴거나 뉘엇뉘엇 기울어야 하겠죠. 꼬끼오 수탉의 울음소리까지. 제겐 글이 지저분해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병아리를 줍던 날, 입니다. 첫 문장도 아이가 병아리를 발견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뒤로 병아리가 다시 나올 때 까지는 너무도 오래걸립니다. 매일의 무기력함과 짜증은 충분히 나타났다고 보여지지만, 뒤로 나오는 내용을 읽고나서는 아이가 이른 시간에 바깥에 나왔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것처럼 느껴집니다.
자, 병아리입니다. 병아리는 계란판을 탈출하고, 급기야 껍데기를 스스로 부숴버리고 세상으로 나옵니다. 귀엽고 꿈도 있는 것 같지만 어딘가 안쓰럽기도 하군요. 처음 만난 세상을 무서워하며 막막해 합니다. 이 모습은 ‘어른’ 들의 시각에서만 묘사된 것 같아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보편을 말하겠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만난 아이는, 부모로부터 유전된 꼰대의 언어로 병아리를 훈육하려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장만해두신’, ‘나이가 같은 친구’, ‘말을 안 듣고 돌아다니니 이런 과자부스러기나’, ‘원래대로라면 친구들과’…등등. 결말을 읽기 전까지는, 이 부분이 대물림되는 기득권의 강요를 비판하려는 내용인 줄로 알았습니다… 우선 넘어갑시다.
아이는 병아리를 치킨집에 데려가 생닭들을 만나게 해 줍니다. 닭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우리의 병아리는 양념치킨에 현혹되어버리는군요. 이 병아리가 뭘 상징하는지 정확히야 모르겠지만 그저 ‘철없는 10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음은 확실합니다. 감동도 없고 뻔하죠. 심지어 선배의 노력하라는 말은 호기로웠으며, 병아리는 반박하지 못합니다. 자. 그래도 아직 판단하기는 이릅니다.
귀여웠던 병아리는 빠르게 성장합니다. 급할 거 없다는 아이의 말과 병아리의 대꾸도, 아주 전형적이고 틀에 박힌 대화로군요. 나름대로 심각하게 방황하는 병아리의 삶은 결국 ‘상팔자’ 이며, 철없는 캐릭터여야 하는 병아리는 역시 귓등으로 흘립니다.
새로 등장하는 인물은 트럭 청년. 아무 반전은 없습니다. 경험이 많다는 근거로 병아리를 비난하고, 아이의 말은 전혀 듣지 않던 병아리는 충격을 받았답니다. 거리에 진열된 멋진 서양닭. 금방 꺾여 의지를 상실한 병아리. 조금만 더 참아봅니다. 아직 닭강정이 남았으니.
닭강정이야 물론 되바라지게 나왔습니다. 그래도 자기들끼리 잘 있다는 이야기는 하네요. 잠깐입니다. 로스트 치킨집의 닭을 질투하고, 땅콩가루에 정신이 나가버리는 족속들이죠. 선정적인, 관능, 육감, 자극적, 남사스럽게 살을 부비는, 2차 성징… 도대체 작가가 창녀(남창)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드러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실제로 마약에 찌들고 섹스에 집착하는 사람도 분명 한 명쯤은 있겠지만, 어떤 하나의 인물로서 이름이 붙어있지도 않은 대상을 이렇게 묘사하는 건 변호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그 문단에서, 작가 본인의 낡은 성적 고정관념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라면 성공하셨습니다.
비둘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새가 나옵니다. 병아리가 후회를 한다는군요. 하찮은 비둘기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이런 세상에. 이 병아리가 닭이 되려면 저 비둘기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이제 소설이 거의 끝나가는데, 전형적인 모습들만 보입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다. 그니까 어른들 말씀 잘 들어라.
거짓말처럼 어른이 나옵니다. 배불뚝이 아저씨라는군요. 뜬금없이 등장한 이 아저씨는, 지쳐 쓰러진 병아리에게 위로 한 마디 못해줄 망정 양계장이 문제라며 대뜸 화를 냅니다. 그러고는 너네들이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러는 거다, 너들 생각이 갇혀 있어서 그러는 거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며 요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쏟아냅니다. 병아리와 아이는 그 이야기에 빨려들어가 집중해서 듣고 있지만, 소설 밖에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파닭. 자신만의 치킨이 되게! 병아리는 ‘물론이고’ 아이도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른의 격려와 조언으로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는군요.
그래서 결국 그 부족한 상상력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은 없이 떠납니다. 아이가 진행하는 스타트업에 후원을 해 준 것도 아니고, 병아리에게 종합 영양제를 사 준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배불뚝이 아저씨는 오늘도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는, 끔찍한 자기만족을 얻게 되었죠. 결말. 병아리는 씩씩해져서 노을을 향해 걸어가고, 아이는 피곤한 상태로 언제 어른이 될까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죄송하지만 말해야겠습니다. 씨발.
마음 같아서는 꿈을 꼭 찾으라고 외쳐주고 싶었다. 친구의 앞날을 힘껏 축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은, 사실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쓴 문장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 그냥 제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좋겠군요. 병아리가 알아서 꿈을 찾을 테니 아이가 구태여 응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아니, 그럼 최소한 이젠 어떻게 ‘하든’ 이라고 해야 될텐데. 그럼 정말로 아이가 이제 내 인생 고민해야되니까 병아리가 어찌 되든 상관 없다는 소린가? 모르겠군요.
다른 인물들은 어떤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지 확실해보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아이-병아리 관계가 조금 입체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함수로 정리할 수도 있겠습니다.
생닭들-이런저런 스펙을 쌓고도 불안한 취업준비생
닭강정-성노동자
로스트 치킨-성공한 사람
비둘기-실패한 사람
배불뚝이 어른-좋은 인생선배
이 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초반에 아이가 병아리를 이끌고 가는 장소가 치킨집이라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병아리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외의 세계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죠. 이렇게 나온 이상, 작가가 병아리의 미래를 하여튼 치킨이라고 정해놓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게 됩니다. 병아리가 어떤 양계장의 어떤 사육장에서 어떤 먹이를 먹은 닭으로부터 탄생한 것인지를, 그 출신과 스펙을 극복해내고 도달하는 곳이 결국 매일 깨끗한 기름에 튀겨 친환경 재료로 만든 소스에 버무려지는 정도라는 겁니다. 아이는 그걸 먹겠지요. 트럭 청년도, 배불뚝이 아저씨도 그걸 맛있게 뜯어 먹을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힘겹게 껍데기를 깨부수고 탈출한 병아리의 도약을 결국은 한 때의 방황으로 일축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 머나먼 미래의 병아리가 자신을 치킨의 세계에 가둔 아이를 살해하지 않는다면요. 결국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리스 희곡이 아니라, 기득권의 강요에 굴복하라는 봉건적 프로파간다로 보입니다.
우리가 먹는 치킨은 병아리도, 닭도 아닌 애매한 상태의 것을 주로 튀긴다고 들었습니다. 이 글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아이와 병아리가 각각 등장하는 건, 덜 자란 병아리가 언젠가 튀겨져버릴지 몰라도 아이만큼은, 그리고 우리는 다른 고민과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라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사회의 여러 불합리한 격차들과 차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건 알겠으나, 그 내용이 뻔하고 주장은 빈약합니다. 문장을 가다듬고 더 견고한 글을 쓰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