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행위 감상

대상작품: 한없이 투명한 삶 (작가: 빗물, 작품정보)
리뷰어: Meyond, 20년 8월, 조회 37

인간의 지각 행위는 그 주체가 형성하는 세계의 지배적 수단이 되어준다. 뭘 본다는 행위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대상 전부를 중립적인 실상처럼 느끼기가 쉽지만 실제로 우리가 정의 내리는 세계는 철저히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왜 이런 문장으로 리뷰를 시작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지각 행위가 다분히 주관적임을 꼬집어 말하고 싶었다. 물리적으로 따지자면야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스쳐 지나치지만, 사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지나친다는 말이다.

이 작품 속에서 이야기는 ‘선아’를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그런 선아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선아는 타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다. 아니 정확히는, 눈에 띄지 않게 숨고 싶을 때는 숨겨지지 않으며 뭐든 타인이 알아채 줬으면 할 때면 그런 마음이나 사정이 교묘하게 주변인들의 시야를 비낀다. 이와 관련한 선아의 독백을 읽으며 사실 조금 의아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계속 투명하기만 하거나 혹은 묘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계속 불투명하기만 하다면 모를까, 필요할 때마다 마음과 상황이 정반대로 움직이는 걸 두고 작가는 어째서 ‘능력’이라고 표현했을까? 하고. 하긴 어찌 보면 인간사라는 게 가끔은 성가신 분노가 치밀 정도로 비이성적인 무논리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핍진성이 느껴지는 서술이기는 하다.

아직 초반이라 이러쿵저러쿵 작품에 관해 논하기에는 분량이 다소 적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삶 속에서 한없이 투명한 자신의 존재를 지각하기 시작한 어린 선아의 이야기가 그 바깥에서는 존재감 있게 여러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의 리뷰를 쓴다. 작품 속에서 실존 아동 대상 친족성범죄 사건을 다룬 대목은 특히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이 이야기를 통해 선아의 그 능력 아닌 능력이 빛을 발해 선아의 주변 세계 곳곳을 조명해 주기를 기대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이 작품, “한없이 투명한 삶”을 읽고 나니 문득 지난 봄에 종영한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의 마지막 장면에 실린 인용 문구가 떠오른다.

좋은 파수꾼이 불운한 일을 쫓는다.
   ― 가브리엘 뫼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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