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혐오, 약자성 비평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눈물을 마시는 새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케이토, 20년 8월, 조회 845

“그것이 제 죄입니다.”

“뭐라고?”

“그것이 제 죄입니다. 저 자신의 마지막 한 부분에 끝까지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 제 죄입니다. 저는 저의 마지막 한 부분을 긍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죄로 생각합니다.”

티나한은 그것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루가 다시 말했다.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저는 그것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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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대한 비평입니다. 독자님들과 함께 감상을 나누고 싶어 쓴 글이지만 이영도 작가님이 봐주시면 그것도 즐거울 것 같네요. 이영도 작가님 보고 계세요? 보고 계시면 덧글로 당근당근을 흔들어주세요

 

00.

이 리뷰에는 이영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언급과 스포일러도 등장합니다. 계속 작가의 다른 작품이 언급되는 이유는 제가 비교를 위해 다른 한국 작가를 언급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0.

시작에 앞서 이런 주제에 익숙하신 분들께는 지루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과거의 어느 작품을 이해할 때 현재의 잣대를 가져다대는 것은 불공평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영도 타자의 『드래곤 라자』(1998)에는 남자 주인공인 후치가 도둑맞은 돈을 찾기 위해 작중에서 손꼽히는 천재 책략가가 수립한 작전을 진행하지요. 그 작전이란 아무 상관도 없는 미성년자인 술집 여자 종업원을 알몸으로 만든 다음 역시 미성년자인 후치가 침대에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작중에서야 기발한 작전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작품 외적으로 보면 그다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설픈 작전인데다가 후치 자신도 말하듯, 그게 뭐 잘하는 짓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후치는 착한 소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저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의 후치의 독백에서 언급되는 ‘위선’에 대한 고찰을 좋아하고 그에 대해 동의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슈퍼맨』의 빌런 렉스 루터의 사상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한 사람의 선의 (혹은 위선) 으로 보장되는 안전이 아니라 개개인의 선의가 없어도 안전한 시스템입니다. 후치 일행이 그들의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무력한 일반인이 말려들어 입을 피해를 걱정했다면 그 일반인의 안전을 후치 개인의 선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일반인이 피해를 겪지 않아도 되는 작전을 만들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후치 일행이 계획한 작전에서 후치는 여행자 행세를 하며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 작전이 꼭 필요했다 하더라도, 후치의 여행짐에 종업원이 갈아입을 여성용 옷가지 몇 개를 집어넣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게 그렇게 떠올리기 어려운 천재적인 발상인가요? 결국 『드래곤 라자』에서 이영도 작가는 남자 주인공과 이런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여자 조연을 벗겨 한 침대에 넣는다는 자극적인 재미를 위해 작품의 치밀함마저 희생한, 작품성 측면에서는 명백한 실책을 저지른 것입니다.

2020년 올해 이 작품이 나왔다면 이 부분은 여러가지 비판을 받았겠지요. 하지만 『드래곤 라자』가 쓰인 해는 24년 전인 1996년이고, 공교롭게도 이 해는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법제화된 해이기도 합니다. (예, 그 전까지는 성희롱이 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도덕은 현재 우리가 가진 도덕만큼 발전하지 못했었고, 그때에는 모두가 그런 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판사나 국회의원같은 사람들조차요. 그런 상황에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재미삼아 첫 장편소설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한 스물 네 살 짜리 청년에게 ‘왜 그 글을 쓸 때 다른 사람들보다 24년 정도 앞서나가는 성인지감수성을 가지지 못했냐’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그건 그 자체로 또다른 폭력일 겁니다.

 

1.

하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럼에도’ 과거의 작품에 현대의 잣대를 가져다 댈 수밖에 없습니다. 작품을 집필한 작가는 과거에 살고 있지만, 그 작품을 읽는 우리는 현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집필은 작가가 펜을 놓는 순간에 이뤄지지만 그 완성은 이야기가 작품을 읽은 독자의 안에서 녹아들어 재구축되었을 때 이뤄집니다. 그렇기에 열 명의 독자가 있으면 작품도 열 개가 있다고 말하는 거지요. 따라서 2020년의 독자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2020년의 잣대를 이용해야만 합니다. ‘지금 보니 이 작품 쓰레기네’ 같은 소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고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우리는 H. P. 러브크래프트의 저 유명한 크툴루 신화 체계에 속한 소설들이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소설이 담고 있는 수치스러운 인종 차별적 성향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J. R. R. 톨킨이 창조한 위대한 세계와 그 역사, 그리고 그가 문학사에 남긴 불멸의 족적을 보고 경탄하지만 동시에 그의 소설에서 피부 검은 인간은 언제나 악인이며 좋은 오크는 죽은 오크 뿐이라는 사실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종류의 가치를 서로 분리하는 일입니다. 아이작 뉴턴의 역학 이론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뉴턴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했을 만큼 위대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뉴턴 역학을 전공 연구분야로 삼는 물리학자같은 것은 없습니다. 뉴턴 역학의 과학사적인 가치나 아이작 뉴턴의 과학자로서의 위대함은 영원토록 불변하겠지만,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뉴턴역학의 연구주제로서의 가치는 열화된 것입니다. 과학이론조차도 이럴진대 문학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길가메쉬 서사시는 당대 최고의 문학이었겠지만 지금도 길가메쉬 서사시를 최고(最高)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대의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납니다. 톨킨과 러브크래프트의 문학사적 가치와 그들의 문학적 위대함은 불변하겠지만, 문학을 보는 우리의 잣대가 성숙해짐에 따라 그들의 작품이 가지는 문학적 가치는 (도덕적 측면에서든 아니면 다른 측면에서든) 상대적으로 열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항상 일어났던 일이며 또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일입니다.

긴 서두에서 짐작하실 수 있듯 이 리뷰에서 저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나타나는 차별과 혐오, 그리고 약자성에 대해 2020년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입니다. 좋은 점은 좋게 평가할 예정이지만 나쁜 점은 공격할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질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이다’, 같은 소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인 우리가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배경 지식도 갖추지 못한 독자 (예를 들어 아직 나이가 상당히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독자라든가)가 러브크래프트를 읽을 때 모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악한 신을 숭배하고 세계를 전복시킬 의식을 거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고, 『반지의 제왕』을 읽을 때에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이들이 반드시 사악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할 필요가 있듯 『눈물을 마시는 새』에도 그런 지적 정도는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2.

『눈물을 마시는 새』 (이하 『눈마새』)는 2002년, 축구 월드컵이 개최되던 해에 단 5개월동안 연재된 소설입니다. 네 제신들의 가호를 받는 네 선민종족-인간, 나가, 도깨비, 레콘-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지요. 차별의 역사란 곧 인류가 ‘자신과 비슷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닌’ 타인을 배척했던 역사이니만큼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은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좋은 무대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네 종족이 다뤄지는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의 판타지에서 종족들을 다루는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톨킨의 소설에서는 종족에 따른 선악 구도가 명백합니다. 엘프=아름다운 용모=고결한 성품, 또는 오크=추악한 외모=사악한 성향 같은 공식이 성립합니다. 엘프도 타락하거나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고결한 존재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정도에서 그칩니다.  또 최초의 RPG인 던전즈 앤 드래곤즈 (D&D)에서 역시 선악의 개념이 종족적으로 구분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D&D 팬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꽤 있는 부분인데, 예를 들어 ‘용사들이 괴물들의 습격을 물리치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서사는 사실 신항로 개척의 시기에 괴물같은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유럽 바깥을 탐험하던 정복자들의 서사에서 비롯한다는 비판이 있지요. 앞서 말한 논조대로 말하자면 ‘나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타인을 처단하는 재미’를 위해 시스템적으로 ‘그 타인(=몬스터)은 악이다’라는 정당화를 구현했다는 비판입니다. 확실히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겠지요.

『눈마새』에서 종족이 다뤄지는 방식은 그보다는 오히려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에서 외지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또는 『헤인 연대기』에서 다른 행성인을 다루는 방식과 더 닮아 있습니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군도 사람들은 먼 땅 카르그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상종 못할 타인으로 여겨 경계하지만, 작중에서 카르그 사람들이 종족적이고 근원적인 악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어스시』의 주인공이 속한 군도 사람들이 오히려 유색인종이고 카르그 사람들이 거꾸로 군도 사람들을 가리켜 야만인이라고 부른다거나, 그밖에 다른 수많은 요소들을 지목해가며 『어스시』에서 왜 카르그 사람들이 그렇게 다루어졌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그들 역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드래곤 라자』의 한 장면을 인용합니다.

“후치? 왜 그러죠?”

“아, 아뇨. 펠레일의 말대로라면, 참 지독한 놈이죠?”

“놈? 알 수 없지요. 인간일지, 인간이 아닐지.”

(중략)

펠레일은 이루릴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예. 사람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게덴의 신자들은 거의 인간이니까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서 인용.

『드래곤 라자』에서 놈, 또는 사람이라는 단어는 인간에 대해서만 통용되는 말입니다. 엘프나 드래곤에게 ‘놈’에 해당하는 ‘타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있을지 궁금하지만 아마도 그런 설정까지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여기에서 ‘사람’은 ‘인간’의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엘프는 사람이 아니라 엘프일 뿐이고, 드워프는 사람이 아니라 드워프일 뿐입니다. `사람은 영장류`의 일종이라고 정의하는 현실 세상의 사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두 단어 사이의 차이는 한자어냐 토박이말이냐의 차이밖에 없으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눈마새』에서는 여기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눈마새』에서 인간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쓰이지만, ‘사람’이라는 단어는 네 선민종족, 그러니까 나가, 인간, 도깨비, 레콘 전부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아래와 같이 사용되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하늘치를 처음 본 사람입니다.” – 오레놀 대덕 (인간)

<저는 누님의 동생이기에 앞서 수련자입니다. 장차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랑이 될 사람이지요.> – 화리트 마케로우 (나가)

“예? 호미걸이였습니다! 도깨비들 중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 비형 스라블 (도깨비)

“티나한. 당신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전하는 사람이 나인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하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시오.” – 즈라더 (레콘)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이와 같이 『눈마새』에서 사람의 정의는 ‘인간’이라는 단어보다 좀더 포괄적입니다. 『드래곤 라자』에서는 오크나 드워프, 엘프, 인간, 드래곤 등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단어가 없지만, 『눈마새』에서의 정의를 가져다 쓰면 오크, 드래곤, 인간은 모두 ‘사람’의 하위 분류가 됩니다. 『폴라리스 랩소디』(2000)에서 먼저 땅을 거닐었던 엘프들 역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오버 더 호라이즌』(2001)에서 먼저 사용된 이 용어의 차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용어의 용례 자체가 『눈마새』의 주제 그 자체인 ‘타자를 아우르는 포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톨킨과 D&D에서, 그리고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가의 전작인 『드래곤 라자』에서조차 종족적 차이는 곧 (예외가 있더라도) 선함과 악함, 우월함과 열등함, 고결함과 추악함을 가르는 차이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눈마새』에서 묘사되는 종족들은 다른 작품들에서 묘사되는 비인간 종족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정말 작가가 다른 외계 행성에 가서 외계 종족을 관찰한 후 집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이종족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종족적 차이가 근본적인 선악이나 우열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작중에서 가장 먼저 완전성에 도달했다고 말해지는 ‘첫 번째 종족’조차도, 완전성에 도달한 첫 번째 빗방울인 것으로 묘사될 뿐 그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네 종족보다 우월한 태생을 지녔기에 먼저 나아갔다고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북부군의 불구대천의 대적인 나가들도 저마다의 선악을 지닌 채로 울거나 웃으며 살아갑니다. 그들 역시 사람이니까요.

역사적으로 ‘나와 다른 자들’과의 싸움을 멈추게 한 것은 언제나 ‘나와 더 많이 다른 자들’의 존재였습니다. 국내가 어수선하면 정치가들은 언제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죠. 임진왜란만 봐도 그랬습니다. 이영도 작가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2005)에서 외계인의 출현은 통일한국을 만들었고, 『별뜨기에 관하여』(2008)에서 리볼피트 인들은 단일인종이기 때문에 그보다 작은 분류인 계층 문제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인종이 같아?”

“리볼피트인은 단일 인종이야. 원래는 여럿 있었지만 다른 인종들은 까마득한 옛날에 다 정리된 거지.”

“정리라니. 멸종당했다고?”

“네안데르탈인처럼.”

나는 크로마뇽인의 후손을 대표하여 커피팩을 스크린에 던지려다가 그것이 돌도끼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참기로 했다.

“단일 인종인데 무슨 인종 차별이라는 거야?”

“버스에서 쫓겨난 숙녀가 가난한 백인이고, 킹 목사도 가난한 백인이야.”

“뭐야? 그럼 인종 갈등이 아니라 계층 갈등이잖아.”

“리볼피트에선 인종이나 다름없어. 단일 인종이다 보니 그런 것이 구분 기준이 되나 봐.”

이영도의 『별뜨기에 관하여』에서 인용.

 

그러니 차별과 포용을 논하기 위해 인종보다 더 큰 분류인 종족을 가져오는 것은 타당한 접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영도 작가는 각 종족들 사이에서의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것으로 현실 세상의 혐오를 비추는 대신, 종족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차별 없는 사회’를 그리는 것으로 작품의 주제를 더욱 매끄럽게 드러냅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레콘은 그 어떤 종족보다 강력하고 도깨비는 유일하게 불을 다룰 줄 아는 공학의 대가들입니다. 인간은 조직을 유지하는 능력이 뛰어나지요. 그런데 그것이 작중에서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라짓 왕국 최초의 왕은 레콘이었고, 도깨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요. 인간은 신체적으로 무능하니 천대받는다는 묘사도 없고요. 『드래곤 라자』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입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으로만 묘사되었던 서로 다른 종족들이 이루는 조화가 『눈마새』에서는 실현된 것입니다. 

이루릴은 고개를 숙인 채 쿡쿡 웃었다.

“당신은 불완전한 존재니까 제 말을 이해하긴 어렵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단단한 흙벽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예? 어, 자갈과 모래, 지푸라기 등을 적당히 섞어서 반죽을 잘 하면…….”

“예.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흙만 쌓아서는 단단하지 못하지요. 모래만으로는 쌓을 수조차 없고. 자갈들을 쌓아올리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적절히 섞으면 단단한 흙벽이 되지요.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가 달라야 된답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달라야 한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서 인용.

각 종족이 그 고유한 습성과 차이를 유지한 채 서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 『드래곤 라자』에서 이루릴이 말했던 그것이 이미 세계관에 담겨 있죠. ‘사람’이라는 단어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오버 더 호라이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르다는 것이 타자와 포용을 이루는 이상 사회를 그린 것인데요, 이 포용은 작중 최후반부에 케이건 드라카가 말한 사랑과도 닮아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사랑할 수 없을까?”

사모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왜 이해할 수 없을까? 입장을 바꿀 수는 없을까? 길지 않은 생, 가슴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서로 다른 겉모습은 광적인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다시 없이 커다란 축복이 아닐까? 사람은 새로움 속에 살아간다.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늘이 덮인 저 남부의 이방인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극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가장 고마운 선물이 아닐까? 대상이 없는 사랑은 없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사랑을 약속한다.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그들은 나의 또다른 형제며 혈육이다. 그리고 축복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자들인가.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하나 더 얻었다.”

케이건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조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

사모는 이런 거대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이 증오의 원인이 아니라 거대한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혹은 그러했던 사람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사모는 말할 수 없는 감동 속에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얼굴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무서운 추억을 바라보는 자의 눈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이 지점은 작가의 전작인 『드래곤 라자』와 다를 뿐만 아니라 이후 작품들과도 다른 과도기적인 부분입니다. 『드래곤 라자』의 후속작이자 『눈마새』보다 늦게 집필된 『그림자 자국』(2008)에서는 전작에서 취익거리는 몬스터에 불과했던 오크들이 사회 변화에 적응하여 인간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지요.

 

젊은 오크의 말투에는 불만과 함께 늙은 종족에 대한 경멸도 약간 묻어 있었습니다. 그 오크는 이루릴이 말채찍으로 바이크를 때리지 않는다는 사실엔 아직도 충격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루릴은 자신이 이파실-졸란 랠리에 네 번 참가했고 세 번 완주했다는 것을 알려주면 오크가 안심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포기했어요. 허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뻔했으니까요.

“비행기에 대한 소문이 있죠. 원동기가 이렇게 이륜차에 달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된 것도 오래되었는데, 역시 비행기는 완성된 것 아닐까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오크 기술자의 눈에 놀라움과 함께 약간의 존경심이 나타났습니다.

이영도의 『그림자 자국』에서 인용.

 

『그림자 자국』에서 오크 기술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드래곤 라자』에서의 모습을 기억하는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입니다. 오크는 ‘인간화’되어버려 더이상 오크만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죠. 오크가 취익취익거리는 것은 신체 구조때문이라는 식의 언급이 『퓨처 워커』에서 나오기까지 하는데도요. 『드래곤 라자』에서 이러한 변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그려졌는데, 『그림자 자국』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에 잘 적응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성숙한 시민 의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그림자 자국』의 오크는 오히려 성숙해졌다고까지 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적대할 것만 같았고 근본적으로 악한 것만 같았던 오크가 인간과 교류하며 성숙해진 것입니다.

『눈마새』에서 네 선민종족은 ‘인간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마다 너무나도 특징적인 저마다의 특성을 지닌 채로 (나가를 제외하면) 공존하지요. 『드래곤 라자』에서와 달리 이미 ‘사람’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인 네 선민종족은 개성을 가진 채로 조화를 이룹니다. 물론 『그림자 자국』은 『드래곤 라자』로부터 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고 『눈마새』는 모종의 이유로 변화가 멈추어버린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니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할지도 모릅니다. 『눈마새』의 종족들도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림자 자국』의 오크들처럼 개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르지요. 고작 60년 정도 뒤의 이야기를 그리는 후속작인 『피를 마시는 새』에서 이미 ‘가짜 레콘’이라는 존재가 언급되고, 서로 다른 존재가 어울리면 결국에는 변화해 개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드래곤 라자』에서 언급되었던 주제가 다시 변주됩니다. 『피마새』에서 아실은 그런 가짜 레콘을 레콘답지 않은 레콘이라 부르며 혐오합니다. 『그림자 자국』처럼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면, 『눈마새』에서 우리가 아는 나가, 레콘, 도깨비, 인간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기계가 힘 쓰는 일을 대신하고, 개인의 용력이 더이상 사회의 압력을 버텨낼 수 없을 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나면, 레콘은 더이상 ‘숙원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오만한 거인들’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게 꼭 부정적인 변화일까요? 『피마새』까지 이런 변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작가의 이후 작품들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림자 자국』에서 오크들의 변화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서술될 뿐, 오크들이 오크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려 슬프다는 식의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또 그것이 『드래곤 라자』부터 『피마새』까지 주구장창 언급되었던 것처럼 ‘인간이 자신들을 돌아볼 기회를 잃어버린 것’으로 묘사되지도 않습니다. 어째서? 이 변화의 이유는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대위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닥에 앉혔다. 일주일이나 생활했던 방이었지만 내가 어디에 앉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세가 약한 것은 사라지고 세가 강한 것만 남는다는 리선생님의 주장은 맞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습니다. 문화어는 사라지는 말이지요. 한국어도 사라질 겁니다. 언젠가는 지구와 위탄도 사라질 테지요.”
“뭐?”
“문교촉위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상대방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자들은 우리를 교양하는 대신 지구라는 아이와 위탄이라는 아이가 서로 부대끼며 스스로 그런 존재로 자라나길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 존재가 되면 그건 우리가 아는 지구나 위탄은 아니겠지요. 아이와 어른은 다른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구와 위탄이 사라지는 겁니다.”

상상하기도 힘든 장대한 전망에 할말을 잃었다. 암흑과 방독면 때문에 헐떡이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박대위는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큰 소멸을 말하는군. 그럼 이 짓이 쓸모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소멸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포기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소멸이든 포기든 사라진다는 점은 마찬가지야. 쓸모없는 것이라고.”

박대위가 그를 만난 이래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선생님, 9년 전 문교촉위가 요청한 것이 뭐였습니까?”

이영도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에서 인용.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외계인과 우리가 교류하기 위해 서로의 동화를 교환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박대위는 외계인인 ‘위탄인’과 우리 지구인들이 서로 교류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변화할 것임을, 서로간의 교류가 원활해짐에따라 사투리가 사라져가고 소수민족 언어가 사라져가듯 결국에는 ‘지구인’이라는 정체성 역시 사라질 것임을 말합니다. 예, 그것은 상실입니다. 『드래곤 라자』와 『피마새』를 거쳐가며 반복적으로 변주되었듯이, 타자와 교류하면 우리는 교류 이전의 우리를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박대위의 말처럼 그 상실은 소멸이 아니라 포기가 될 수 있습니다. ‘너’와 ‘나’가 아니라 그 모두를 포용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 우리는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포기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박대위의 말처럼, 동화 속의 환상을 잃어버려야만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나’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피마새』에서 치천제와 원시제가 사람에게 강제하고자 했던 것과 『카이와판돔』에서 문교촉위가 위탄인과 지구인에게 강제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은 다른 것이지요.

다시 『눈마새』로 돌아와 보지요. 앞서 적었듯 이영도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너’와 ‘나’를 유지한 채로 서로를 포용하는 것을 이상향으로 설정했고 후기 작품에서는 ‘너’와 ‘나’를 졸업해 ‘우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눈마새』는 그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눈마새』의 네 종족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너’와 ‘나’인 상태로 서로를 포용합니다. 『드래곤 라자』 기준으로 이 사회는 이상향입니다. 하지만 『카이와판돔』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 사회는 ‘우리’가 되기 위해 ‘나’를 포기하지 못한 미성숙한 사회이기도 합니다. 아직 동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타자에게 관용을 베풀 줄은 아는, ‘성숙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언젠가 인류는 인류와는 다른 존재를 만날 것이고, 그 조우 이후 인류는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될 것입니다. 또 언젠가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류 전부가 육신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광대한 네트워크에 정신을 업로드해 하나의 통일된 정신체가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머나먼 미래가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달해야 할 곳은 『눈마새』에서 묘사된 세계일 것입니다. 유년기의 끝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유년기를 성숙하게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숙은 우선 나와 다른 사람이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겠죠.

 

 

3.

기왕 용어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에 대해 좀더 말해볼까요. 무엇을 ‘사람’이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편리한 정의이니 계속 ‘인간’과 ‘사람’을 눈마새에 나온 용법과 비슷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제 와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아주 낡은 주제이지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백 살을 맞은 사나이』가 네뷸러 상을 받은 것이 1976년이고, 1999년에는 이미 영화화까지 되었으니까요. 제가 아주 재미있게 읽은 웹툰 중에는 『데이빗』(https://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745186&weekday=thu)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기적처럼 태어난 말하는 돼지 데이빗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인데, 작중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 댓글란에서도 그대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작가의 화두를 던지는 능력에 충격을 받고 또 감탄했었지요. 이 웹툰에 『눈마새』에서 사용한 정의를 가져온다면 작중에서 데이빗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람’이 되겠지요. 레콘과 나가와 도깨비가 인간은 아니지만 사람이기는 하듯, 말하는 돼지 데이빗도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종인 ‘인간’은 아니겠지만 『눈마새』에서 정의하는 ‘사람’으로 부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2020년의 현실 세계에는 그러한 존재가 인간밖에 없고, 『눈마새』에는 네 선민종족만 사람이라고 부를 법 하니 무엇을 사람으로 부를 것인지는 꽤 담백한 고민이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이른 고민도 아닐 겁니다. 언젠가 인류는 외계인을 발견할 것이고, 또 운이 좋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인류 이외의 다른 생물이 인류와 교류할 만큼의 지성을 진화시키는 장면을 볼지도 모릅니다. 현재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보면 인간처럼 사고하고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이 개발되는 일은 현재 젊은 세대가 죽기 전에 벌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야기해 볼 수 있지요. 좀 과격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잡아먹으면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존재‘입니다.

런던 타워에 침입해 컬리넌을 먹으면 엄청난 손해배상과 함께 무거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고 남의 집 애완견을 잡아먹으면 끔찍한 도덕적 비난과 형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닙니다. 광물을 먹는 것이나 육식이 죄는 아니겠지요. 컬리넌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는 인류가 그것에 부여한 가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고, 남의 집 애완견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 역시 그것에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에 그것과 나 단 둘만이 존재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할 다른 것은 존재한 적조차 없다면 그걸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상이 나와 교류하여 대화를 나누고 의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대상을 먹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니 『눈마새』에서 말하는 니체철학적인 의미의 죄와도 어느정도 맥락이 닿아있기도 하네요.

케이건 드라카는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변명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죄인이 변명거리 하나 없겠습니까. 그의 심정이야 이해한다지만 그렇다고 그가 저지르는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 다르다는 것을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그가 다르기 때문에 폭력을 가하는 자로 변해버린 겁니다. 포용을 잃어버렸지요. 세리스마는 그 사실을 안타까워 합니다.

“마지막으로, 케이건 드라카. 부탁하겠습니다.”

케이건은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세리스마를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카루는 최대한 세리스마의 니름을 정확하게 말로 바꾸려 애쓰며 말했다.

“제가 듣고 이해한 것이 맞다면, 당신은 한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긍정과 기쁨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하십시오. 저처럼 되지 마십시오.”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작품 초반부에서 케이건의 식성에 대해 알게 된 티나한과 비형의 대사를 떠올려 보면, 결국 이것은 케이건의 입장에서 더이상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나가를 다시 ‘사람’으로 보아달라는 호소입니다.

 

비형은 괴롭게 말했다.

“나가도 사람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너 두억시니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비형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우리가 서로를 먹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볼 때, 서로를 가치있는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게 될 때, 서로를 ‘사람’으로 여기게 될 때, 비로소 혐오는 멈출 수 있습니다.

 

4.

종족에 대해 언급하며 저는 그것이 차별에 대해 말하는 좋은 수단이라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잘 언급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의 수가 적을수록 가시화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2020년인 지금은 가시화가 많이 되었지만,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어떤 면에서는 인종에 대한 혐오보다도 더 철폐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할 줄 아는 삶’을 강조했던 『눈마새』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작가의 다른 작품을 몇 부분 인용하겠습니다.

“죽기 직전에 해보지 않으면 후회될 일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나는 고개를 갸웃한 다음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나 평소부터 궁금한게 있었는데. 남자끼리 키스하면 기분이 어떨까?”

일행은 모두 폭소해버렸지만 샌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나더니 맹렬한 동작으로 롱소드의 칼자루를 쥐었다. 손발이 잘 맞는단 말이야.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서 인용.

 

“옛이야기 하나 하지.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의 마지막 왕은 권능왕이라는 작자였다. 최악의 왕이었지. 만약 네가 권능왕에 대한 평을 목록화할 생각이 있다면 ‘호평’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할애할 필요가 없다. 그의 무수한 악덕들 중에서, 사람들은 주로 만민회의장을 찾아온 키탈저 사냥꾼들을 모욕한 사건을 그의 최고의 악덕으로 꼽지. 하지만 점잖은 자리에선 차마 거론하기 난처한 악덕도 있는데, 그가 남색가였고 동시에 근친상간자라는 점이 그렇지. 그는 아들을 사랑했어.”

마루나래는 움찔했다. 사모가 그 털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모는 곧 그 털을 놓아주고는 똑바로 앉아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혐오스러운 이야기군.”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칸타는 죄를 저지를 염려가 없어.”

“하?”

“그러니까, 보수적이거든. 꽉 막혔다고 할 정도로.”

“응? 무슨 소리야?”

시하는 뭐 이런 모자란 요정이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게이라고.”

이영도의 『시하와 칸타의 장 – 마트 이야기』에서 인용.

 

『드래곤 라자』에서 동성애는 웃음거리로 묘사됩니다. 물론 현실에 그런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텍스트에도 그런 사람이 나올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아돌프 히틀러 광신자가 유태인 학살을 찬양하는 소설을 쓰고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면 비판받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드래곤 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묘사를 사용했던 작가가 『시하와 칸타의 장』(2020)에 와서는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쓰기까지 하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요. 어슐러 르 귄은 『어스시 시리즈』 첫 3 권에서 ‘여자의 마법은 악하고 약하며 진정한 마법은 오직 남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4권 이후로는 그에 대해 지적하고 해명합니다. 『어스시의 마법사』와 『테하누』가 출간된 것이 각각 1968년, 1990년이니 두 소설 사이의 시간 간격이 『드래곤 라자』와 『시하와 칸타의 장』 사이의 시간 간격과 비슷합니다. 르 귄의 사상이 시대에 맞게 진보한 것처럼 이영도 작가의 사고방식도 진보한 것입니다. 저는 이 변화에 감동마저 느낍니다.

『눈마새』의 위 서술의 경우 과거에 대한 묘사였고, 또 남색보다는 아들을 사랑했다는 점에 좀더 초점이 가는 장면이니만큼 변명의 여지는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이영도 작가가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피마새』에서의 다음 장면은 의문을 해소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틸러는 ‘정우를 사랑하십니까, 무사장님?’ 하고 장난스럽게 말해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틸러는 관두기로 했다. 둘은 종족이 다르다. 농담이 되지 않는다.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에서 인용.

 

자신과 지적인 교류와 감정 교류가 가능한 상대방을 대상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 과학적, 이성적으로 말도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사랑은 정신적인 과정입니다. 사랑이 호르몬의 작용에 의한 육체적인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제가 이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웹브라우저는 하드웨어일까요? 분명 움직이는 것은 하드웨어인데요. 웹브라우저가 소프트웨어인 것과 같은 논리로 사랑은 정신적인 과정입니다. 굳이 풀어서 쓰자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이뤄지는 정신적인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PC통신 세대인 이영도 작가나 독자들도 그렇고,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는 인터넷 세대의 독자들 역시 그런 경험이 있거나, 혹은 주변에서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얼굴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는 상대방을, 단지 텍스트로 이뤄지는 대화 속에서 사랑하게 된 경험 말입니다.

물론 오프라인에서 그 상대방을 만나고,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였다거나, 혹은 그 반대였다거나 하는 이유로 실망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성애 사회에 익숙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를 보지 못하더라도 정신에 끌려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고, 그 수조차 무시할 수 업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거나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혹은 『피마새』의 위 인용에서 나타나듯 ‘도깨비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걸까요? 명백한 논리의 부족이고, 배려의 부족입니다. 다름을 포용하는 삶에 대해 말했던 『눈마새』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결코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5.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이영도 작가는 집필 당시를 기준으로 가장 앞서나가던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 문제는 이영도 작가의 소설이 가장 잘 해내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2020년 시점에서 『눈마새』를 읽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물론 현실 세계의 양성구조가 전복된 나가 사회이겠지요.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체계가 완전히 뒤바뀐 사회를 보여주는 것으로 현실 세계의 성 불평등을 드러내는 『이갈리아의 딸들』이 출간된 것이 1977년이고 해외에서야 페미니즘 문학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집필되어 왔으니 (『테하누』도 1990년 작품입니다.) 물론 이영도 작가가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눈마새』의 나가 사회를 구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영도 작가가 인터뷰 등에서 늘 언급했던 대로 현실 세상의 인간 사회를 거울에 비춰 보여주기 위해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구상하다 보니 여성주의와는 상관없이 그런 가상 사회가 탄생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결국 같은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작가에게 성 불평등을 비춰주고 싶은 명확한 의도가 있었느냐는 정도의 차이밖엔 없지요.) 하지만 이영도 작가가 『드래곤 라자』에서 게이에 대한 농담을 했을 때 그것이 별 자각없이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이라 하더라도 이런 전복적인 사회를 2002년 한국에서 구현한 것에는 크레딧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눈마새』의 나가 사회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성 불평등이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사회입니다.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로 부각된 지금 보면 그때 당시에 읽었을 때와는 또다른 재미가 있지요. 이런 문구들이 눈에 띕니다.

 

사모는 앞으로 한 발 다 가와 륜을 똑바로 바라보며 닐렀다.

<륜.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남자가 준 것만으로 이루 어진 것이 아냐. ‘아버지’라는 그 우스운 단어를 꼭 사용하고 싶다면, 너는 어머님이 드신 동물들과 마신 물까지도 모두 아버지라고 불러야해. 니름도 안 되는 일이잖아?>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저녁 때가 되었으니까. 빨리 나가지. 카루. 륜을 쫓는 것 이외에도 할 일이 있어.>

천장을 날아가는 열에 너무 감탄했기 때문에 카루는 그 일이 뭔지 묻지 않았다. 카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자는 역시 다르구나.’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결국 비형은 티나한을 내버려둔 채 케이건에게 질문했다.

“저, 케이건. 정숙한 처녀라도 같은 여자에게라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요. 륜에게 우린 같은 남자잖습니까?”

“그래서 꼭 적합한 설명은 아니라고 말한 거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소만, 이렇게 알아두면 될 듯하오. 나가 남자들이 벗은 몸을 보여줘도 되는 경우는 어느 가문을 방문해서 어떤 여인이 벗겨주었을 때 뿐이오. 그 외에는 모두 수치스러운 경우요. 아마 남자들이 모두 뿌리도 없이 떠돌아다니다 보니 나가 여자들이 남자에게 그런 완고한 규범을 주입시킨 것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오. 그런 도덕 때문에 나가 남자 들은 수치스럽지 않게 여자를 만나려면 어떤 가문을 방문할 수밖에 없지. 밀림 아무 곳에서나 여자와 놀아나는 대신.”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남성이 철저하게 억압받고 그 역할이 지워지는 나가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작가가 그렇게 묘사했으니까요. 『드래곤 라자』 때부터 이영도 작가가 주구장창 이야기했듯 작가가 판타지 소설을 쓰고 현실과는 다른 이질적인 세계를 만드는 이유는 현실 세상을 거기에 비춰보고 우리 스스로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눈마새』에 비추어진 혐오스러운 나가 사회로부터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겠지요. 물론 나가 사회는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지나치게 갑갑한 사회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들보다 많이 나은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아내나 어머니, 딸을 남자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사회 기여에 대한 여성의 역할을 삭제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며, 남자가 근본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한 양 여기고, 여성의 정조를 중요시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눈마새』의 나가 사회는 결국 거울에 비쳐 좌우가 뒤바뀌어 보이는 우리 사회입니다.

수많은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는 설정이지만 『눈마새』는 이 지점에서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멈춥니다. 나가 사회의 성 역할 전복은 페미니즘을 강조하기 위한 전복이 아니라 그냥 전복을 위한 전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더 뻗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복을 위한 전복에서 그쳤을 수도 있지요. 어쨌든 『눈마새』가 여성주의에 지니는 의의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 중심 사회에서 심장까지 적출하지 않은 나가 사회의 가장 약자인 륜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온 구출대와 만나 한계선을 넘어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기껏 성 역할을 전복시킨 나가 사회를 그렸으면서 전복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장면은 남자 주인공이 남자들을 만나서 모험을 시작하는 장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마치 나가 사회에서 남성의 역할이 배제된 것처럼, 『눈마새』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배제됩니다. 또, ‘전복’된 나가 사회에 불만을 품은 수호자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여성을 상대로 들고 일어나 혁명을 일으키는 장면은 결국 기껏 전복시킨 사회를 다시 ‘역전복’시켜 여자 위에 서는 남자를 그리는 장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쥬어가 쥬어 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차라리 ‘전복’되지 않은 사회에서였더라면 가치가 있었겠지만, 이걸 또 나가 사회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또다시, 남자의 위에 서기를 지지하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껏 사회를 뒤집어 보여주고 그걸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다니요. 이건 모두 그 ‘전복’이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한 아이러니지요.

 

<너 지금 모든 나가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그 선량한 분들을…>

<여자들 세상에 태어나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남자라서 탑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나가들의 사회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나가 도시 어느 곳에 있어도 곧장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높은 건물, 어디에 있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건물로 걸어가면 되니까!>

사모는 중심을 잃고 대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륜은 이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물론 그 분들 중엔 정말로 여신의 신랑이 되고 싶어서, 모든 나가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서 수호자가 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가들을 증오하고 불만과 증오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 또한 분명히 그들 속에 있을 겁니다! 화리트를 벌레처럼 죽인 비아스 마케로우를 생각해 보세요! 벌레나 동물만도 못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길에 지쳐 증오밖에 남지 않은 자들이 거기 있을 겁니다! 그 자들이 나가의 적일 겁니다. 우리의 적이라고요!>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내가 지금껏 설명하…지 않았나? 이런, 미안해. 너무 화가 나서. 그놈들은 쥬어라는 남자의 하수인들이야. 쥬어라는 녀석이 하려는 일에 대해 가문의 양해와 지지를 얻으려고 돌아다니고 있어. 이 집에 온 것도 우리 가문의 동의를 얻으려고 온 거야.>

<그 쥬어라는 자가 남자라고?>

<그래.>

<남자가 하려는 일에 가문의 양해와 지지가 필요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

소메로는 격노를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놀라는 동생을 향해 닐렀다.

<가문을 계승하고 싶다는 거야. 남자 주제에!>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인용.

 

 

호부호형을 못해 억울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미 19세기의 고전이 나와 있는데, 기껏 멋지게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또 똑같은 이야기를 봐야만 할까요?

뿐만 아니라, 아무리 ‘북부는 남성 중심 사회다’라는 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작중에서 직접 등장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는 여자 인간 등장인물이 보늬 당주와 데오늬 달비 단 둘 뿐이라는 점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인샤 대사원에 모인 효웅들 중에는 여자가 없고, 승려들 중에도 물론 없습니다. 여성 중심 사회라는 나가들 중에는 남자 나가가 제법 많이 등장하는 것과는 다르게요. 『피마새』를 보면 이 세계는 여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인데도 말입니다.

제가 판타지 소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같은 소설에 대해 이런 소리를 하면 보통 나오는 반박이 ‘그 시절에는 원래 그랬다’입니다. 판타지 소설에 ‘그 시절’이란 건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그 시절’에는 불을 다루는 도깨비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여자 임금이 등장하는 좀비 소설을 쓰면 ‘어떻게 조선인데 임금이 여자냐’는 반박이 먼저 나오고 뒤에 것에 대해서는 아무 반박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우습고도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눈마새』는 종족들끼리 서로 화합하는 모습까지 그려놓고는, ‘다름을 포용하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해놓고는 여성을 포용하는 법에 대해서는 굉장히 미숙합니다. 다른 신들은 자기 선민종족에게 불, 무기, 이름을 선물하는데 인간의 신은 인간에게 예쁜 여자를 하사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건 여자를 트로피 와이프나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사회를 향한 블랙유머적인 고발일 거야’ 라고 정신승리하고 싶어지는 지경에까지 가게 됩니다. 대체 이게 뭔가요.

 

물론  『눈마새』는 전작들에 비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진보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피마새』와 비교하면 갈 길이 한참 먼 소설입니다. 여자도 후작이든 왕이든 될 수 있고, 군대를 배경으로도 남녀가 모두 묘사되며,  『눈마새』나  『오버 더 호라이즌』에서 각 종족들이 차별 없이 어우러져 공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남녀가 거의 차별없이 공존합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피마새』 에서 헤어릿 에렉스가 ‘공작 계승의 위협이 될 수 없는 여자라서 살아남았다’는 서술 정도는, 뭐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심지어 장편으로는 가장 최근 작품인  『오버 더 초이스』에서조차 티르가 ‘우리 마을은 여자도 술집에 들어올 수 있으니 차별이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거나, 작중에서 여자의 역할이란 대부분 누구 부인 아니면 누구 비서 정도인데,  『피마새』는 그것보다도 훨씬 낫지요.  『눈마새』에서 아쉬운 점이  후속작 『피마새』에서 개선된다는 점은 제가 이영도 작가님을 좋아하는 큰 이유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눈마새』가 2002년에 쓰인 소설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2002년을 전후하여 출간된 국내 판타지/무협 소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르세아린』  – 임경배 (1999~)

『태양의 탑』 – 전민희 (2000~)

『흑기사』  – 김근우 (2000~)

『더 로그』 – 홍정훈 (2001~)

『이드』  – 김대우 (2001~)

『영혼의 물고기』  – 김유정 (2001)

『묵향 다크레이디』  – 전동조 (1999~2002)

『드래곤 레이디』  – 김철곤 (2000~2002)

『룬의 아이들 윈터러』 – 전민희 (2001~2002)

『투명 드래곤』 – 뒤치닥 (2002)

『월야환담 채월야』 – 홍정훈 (2002~)

『치우천왕기』  – 이우혁 (2003~)

『발틴사가』 – 홍정훈 (2003~)

 

2002년 개봉한 한국 영화 중 흥행 순위 5위 안에 든 영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문의 영광』, 『집으로…』, 『색즉시공』, 『공공의 적』, 『광복적 특사』

 

 

이 목록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가 제가 2020년의 잣대를 들이대며 지적한 부분들(인종 차별, 성소수자, 여성에 대한 혐오)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는 독자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저는 『눈물을 마시는 새』가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시대를 앞서나가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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