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히어로, 또는 치맥에 대한 이야기 공모(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공모채택

대상작품: 정의의 일격 (작가: 노말시티,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20년 8월, 조회 161

그러니까, 이것은 정의에 대한 생각

 

누구나 한 번은 ‘정의로움’에 대한 의문을 마주할 때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가. 대체로 불의한 상황들을 보며 우리는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여느 추상적인 개념들이 그렇듯 ‘정의’를 올바르게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정의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이다. 칼로 딱 잘라 여기까지, 경계를 정할 수도 없으며 그것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감히 예측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쓰며 연구하고 사유했지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정의’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정의’의 개념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정의를 도출할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기에 이 사회는 너무도 부조리하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진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그저 내 몫의 불편을 참아내는 정도”로 생각하기에는 시원한 한 방이 부족하다. 소설 <정의의 일격>의 제목에 쓰인 지극히 개별적인, 그러나 시원한 ‘일격’이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정확한 타격으로 개별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이 소설은 ‘모두가 정의로워지는 때’를 기다릴 수 없는 누군가의 작은 울분으로부터 출발한다.

정의의 일격. 어느 히어로물에 나오는 공격이나 기술의 이름 같지만 의외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평범하다. 어느 회사의 대리이거나 직원. 길가에 있는 아무 술집에 들어가도 있는 500cc 잔을 앞에 둔 사람들. 히어로의 자질이라고는 전혀 갖추지 않은 것 같은 마이너한 그들 중 ‘정의의 일격’을 날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로 ‘히어로’란 무엇일까.

‘히어로의 자질’에 대해 말했으니 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말이다. 쫄바지에 망토를 두른 올백머리 남자는 이미 낡은 히어로의 이미지가 되었다. 지금처럼 히어로도 발붙이기 힘든 시기에는 그저 ‘정의’에 대한 건 생각할 시간도 없고, 회사나 학교, 동아리에서 만나는 ‘정의롭지 못한’ 누군가를 버텨내는 개인이 히어로가 아닐까. 서사시적인 영웅보다는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매일을 견디고 있는 우리가 진정 히어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영웅은 한 명이지만 우리는 여러 명이니까.

이 소설이 재미있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의미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냐고 끈질기게 질문한다면 또 그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이 유쾌한 소설에서 나는 의미를 더 많이 읽었다. 불의한 이를 향해 누군가 ‘목젖 촙’을 날리는 우스운 상황에서 어떻게 진지할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이 소설은 한편으로 슬프다. 그러니 나는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시작해보려고 한다.

 

제발 아무도 보지 말아 주세요.

 

아. 물론 이 리뷰를 보지 말아 달라는 것은 아니다. ‘제발 아무도 보지 말아 주세요’는 이 작품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은 광인을 향해 “우아한 궤적”으로 싸다구(?)를 날리든, 직원을 성추행하는 팀장에게 일격을 가하든 이 소설의 인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정의를 실천한다. 아니, 이들은 자신이 행하는 정의를 ‘누구도 보지 않기’를 원할 것이다. 이름이며 일격을 가하는 행동이 자칫 오해를 살 만한 우스꽝스러운 것들이니까. 우리는 흔히 ‘업적’과 ‘성과’를 중시하는 때에 살고 있는데, 왜 이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누구도 눈치채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내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도 명료하다. 우리의 사회가 정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격’의 형태를 띤 정의는 일상에서 마주하기에 무척 갑작스럽다. 히어로도 아닌 회사원이 촙을 날리는 것은 조금 민망하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노말시티 작가는 ‘일격’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소설에 녹였다. 사람들이 나의 정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이 소설 전반에 깔린 생각이다. ‘정의’는 정의롭지 않은 이 세상에서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그러니 제발 아무도 보지 말아주세요, 주인공 기현은 일격을 날리며 이렇게 빌었을지 모른다. 이 생각이 기현만의 것은 아니다. 어쩌다 ‘불가피하게’ 정의를 실현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때, 우리는 종종 기현과 같은 마음을 가진다. 내 정의가, 작고 사소하지만 눈에 확 띄는 이것이 남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마음 속의 일격을 고이 접을 때가 한두 번은 아니다. 기현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는 보장이 되어있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정의를 실천해 나간다.

 

보편적인 정의란 불가능하다면 개별적인 정의가 모여 보편성을 획득할 수는 있을까. 소설 <정의의 일격>은 그에 대해 물음표를 띄운다.

“그 일격 말이에요. 반드시 정의로워야만 가능한 건 아니에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 정의의 일격에 필요한 단 하나의 요소다. 개인의 정의는 ‘의지’로 생긴다. 저마다 의지가 생기는 지점에 차이가 있기에, 보편적 정의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뉘앙스를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있어 인물 간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감수한다는 것, 또는 불의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찬반양론은 지금도 팽팽하다. 보편적 정의가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소설의 후반에서는 인물들의 의견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간극이 팽팽히 맞선다. 독자들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그것 역시 자유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의는 의지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K-히어로물의 씨앗, 또는 맥주와 치킨의 맛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많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여러 날을 고민했다. 이 소설이 좋다, 또는 나쁘다 라고 구분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애 있다. 일격을 통한 정의의 실현은 분명히 신선하고 K-히어로의 형태로서 나아갈 수 있는 특징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불의하고 또 불의한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편함’이 왜 떠나지 않았을까. 첫째로 이 소설에는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가 없다.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파편적으로 소설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가 전하려는 정확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물론, ‘정의’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독자에게 던지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는 세 인물의 등장이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죽음과 정의 등, 크고 모호한 범위의 개념을 중심으로 소설을 전개했음에도 세 인물의 파편적인 대화로 소설이 진행되었기에 그 안에서 굵은 맥락과 중심을 잡기는 힘들었다.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면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전체적인 소설의 전개가 빠르다. 소설의 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척도는 ‘죽음’으로 다가가는 속도였다. 이 소설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너무 빨리 등장시킨다. ‘죽음’은 소설 안에서 가볍게 다루어지기는 어려운 것으로, 하나의 ‘방점’을 찍는 데에 사용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한 ‘일격’에 맞는 죽음은 짧고 강렬하기에 작가의 의도에 따라 대단히 다양하고 특별한 색을 지닐 수 있다. ‘정의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도 되는가’라는 메시지가 무거운 만큼 ‘최종 보스’라는 느낌이 들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갔다가 소설의 끝에 그 이야기를 한번에 풀어낸다면 이 소설 안에서 ‘죽음’이 보다 많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로 ‘조직’의 정보가 매우 적다. ‘조직’은 이 소설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지나칠 수는 없는 빈도로 언급이 되며 ‘일격’의 출발점이라는 중요한 지점에 있다. 그런 조직이 소설에 전면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작가의 의도일 수 있지만, 과연 효과적이었을지는 의문이다. ‘조직’은 작가가 가진 의견과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매력적인 그릇이 될 수 있었다. 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조직의 규율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소설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중편이나 장편으로 발전시키며, ‘조직’에 대한 작가의 느낌과 색깔을 확고히 하고 진행의 스펙트럼을 보다 넓고 깊게 잡고 간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견을 전하고 싶다.

 

하나의 단편으로 생각하기에는 완결성보다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다. 더 나은 소설로 가기 위한 하나의 씨앗을 본 느낌이었다. 뚜렷하게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전개와 인물을 조직적으로 이어내고, 노말시티 작가만의 다양한 ‘진상’을 더 보여준다면 매력적인 작품이 될 방향을 충분히 담은 소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철저히 한국적인 불의의 상황 안에서 찾아가는 치밀한 작품으로서 그 기능을 하는 단편이다. ‘일격’이라는 간단한 동작과 커다랗고 복잡한 세계의 의문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설의 진행이 좋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이루는 정의는 노말시티 작가의 작품에서는 치맥의 모양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치맥을 하면서도 히어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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