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감상이 주가 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시린 바람이 불어대는 와중에도 그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날은 있다. 미처 얼지 못한 물방울들은 겨울비가 된다. 빗방울은 코끝을 간질이는 달큰한 체취와 함께 화자의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앉는다. 이 작품은 한반도의 가장 아린 날들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
갑오 개혁때 공식적으로 신분제를 철폐하였다고는 하나, 사람의 인식은 그리 쉬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양반으로 살았던 이들은 일제 강점기가 다 되어서도 대를 잇고 가문을 일으켜 세울, 사회에서 출세할 인물을 배출하는 것에 급급하여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무시하는-사실 알고 싶지도 않아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화자와 화자의 나어린 숙부인 윤창 아재가 그러한 분위기의 피해자가 된다.
조용하고 얌전하게, 어른들의 말씀에 그저 머리숙여 예, 하던 윤창 아재의 모습은 어른들의 눈에 보이려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단번에 출세길에 오를 것 같던 그가 공부하러 간 줄로만 알았던 경성에서 실은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로 가 김구 선생 밑에서 일하겠다고 하다니! 근로정신대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 여학생을 집안 어른 모두가 반대할 것을 알면서도 혼인신고라는 방법을 통해 구해 오다니! …화자가 아재를 보고 나이가 어려도 어른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화자는 양반 가문의 종손이다. 화자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린 윤창아재는 아버지와 자신에게 쏟아지는 집안 어른들의 눈총을 피해보려 안간힘을 쓴다. 어딜 가든 1등에, 장학금을 받고 제국대학까지 들어간 그에게는 이전과는 다른 관심이 쏟아진다. 동리의 자랑, 집안을 일으킬 인물! 바로 양반 집안이 그토록 원하던 인물상인 것이다. 윤창 아재보다 다섯 살 많은 종손은 윤창 아재를 미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집안 어른들의 태세전환에 쓴 웃음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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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매력은 얼어붙은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구현되는 담담한 분위기에 있다. 작품 분류는 로맨스지만 격한 사랑의 표현은 없다. 단지 잠시라도 배를 곯지 않고 평화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말하는 앳된 숙모와, 그런 그녀를 여린 소녀로 보는 화자만이 존재할 뿐이다. 격한 것은 시대 상황과 집안 어른들의 윤창 아재에 대한 기대 뿐. 이제 미망인이 되어버린, 아주머니라 불러야 할 앳된 단발머리의 여인에게 화자는 어떠한 감정을 느낀다.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채지만 끝내 이름붙이지 않는, 이름 붙여서는 안되는 감정. 실례인지 알면서도 손을 붙잡고, 아기처럼 꽉 껴안게 하는 그 감정은 묘한 열기를 띤다. 그러나 화자는 끝내 입밖에 내지 않는다. 단지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여 축축한 겨울비를 맞으며 화자에게는 새로운 세상인 상해로 향한다.
가문에 해를 끼칠 자라면 그대로 끊어내버리는 양반 가문의 방식이, 일제 치하에서 일하는 자들의 비아냥이, 또 이런 풍경을 만들어 낸 일제 강점기의 모습이 가슴시리다. 윤창 아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핏 유약해 보이는 화자의 숙부는 모든 걸 감수하고 시린 계절을 끝내기 위해 떠난 것이겠지.
가장 추운 계절에 찾아온 따뜻한 날에 내린, 미처 눈이 되지 못한 빗방울은 끝까지 그들의 삶을 적실 것인지. 화자와 단발머리 소녀의 이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