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좀 더 뻔뻔하게 존재할 수는 없는걸까 공모(단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확률의 무덤 (작가: 하진, 작품정보)
리뷰어: 이채윤, 5월 20일, 조회 103

유명한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 만물을 이루는 입자들이 확률로서 존재하며, 사람의 관찰 여부에 따라 상태가 달라진다는 이 이론은, 일반인들을 난감하게 만든다. 객관적 진리의 최첨단에 있다고 여겨지는 물리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허황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정확하고 똑똑한 양반들인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저러지? 하지만, 물리학 전공자로서, 그 이론이 검증되기까지의 수많은 실험과 공식을 안다면, 양자역학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는 세계에 대한 경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양자역학과 확률론을 믿는다면, 이 작품의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할 것이되, 믿지 않는다면 그저 어수선하게 느껴질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 복 되다’라는 성경 어구가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나 혼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타자의 시선 속에서 존재한다. 단순히 인간은 외톨이 생활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나 혼자, 나만의 의식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마치 사물처럼? 그럴 수 없다. 사르트르처럼 말하자면 사람은 그런 즉자(卽自)존재로서 존재해선 안 된다. 외톨이도, 난 타자에게서 격리되어 혼자 살아가는 외톨이라고 자기 자신을 규정하며,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타자의 시선을 포함한 자기 이미지 안에 들어가 있다. 실험에 몰두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결국 그 모든 실험들은 언젠가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고, 실험의 실패는 곧 존재의 끝을 암시한다. 사람은 모두 타인의 시선, 나를 향한 타인의 버거운 평가와 시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한다. 타인들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나의 존재다. 나를 비춰줄 거울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여러 타인들에게 나 자신의 존재를 내비치고 내던지면서 살아간다.

문제는 그런 실존적인 삶의 내던짐이(기투.企投), 이 작품의 철학처럼 확률적으로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기투가 타자에게 관찰될 확률. 나는 큰 마음을 먹고 내 자신을 타자에게 던져서,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건만, 아무에게도 관찰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홀로 존재하다가, 급기야 타인의 관찰 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인물이 되고, 우주로 흩어져버리게 되는 현서는, 우리 모든 존재의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타인의 시선이 버거우면서도 관찰되어야만 하고, 그렇지 못하면 소멸하는 운명을 말해준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슬프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한가지가 아쉽다면, 오로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차라리 우주로 흩어져버리기로 결심한 주인공의 결정이 못내 아쉽다. 다시 말하면 현서가(혹은 작가가) 훨씬 더 뻔뻔하고 능글맞았다면, ‘나’에게 달라붙어 ‘나의 존재를 위해 365일 24시간 관찰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있고, 그 시선과 죄책감을 이겨낸다면 그는 계속 지구에 존재할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무거운 실존주의 단편이 아닌, 티격태격의 SF판타지로맨스 장편이 탄생했을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