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장편 좀비물이 있었습니다. 그때 작가님께서 이 작품도 추천해주셨는데 당시엔 이런저런 이유로 잊고 있다가(브릿G엔 읽을 거리가 너무 많단 말입니다…) 최근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완독하고 느낀 점은 역시 작가님이 추천해주실만 한 작품이라는 점이었지요.
제목부터가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를 홀로 걷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은 분위기의 ‘잿빛 길을 걷다’ 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물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쓸 때 제목을 정하지 못해서 며칠을 방황하는 저로서는 부럽기만 한 멋진 작명센스입니다.
이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좀비물 팬을 위한 후회없는 선택’이라고 해야 할까요.
홈쇼핑 광고문구같기도 합니다만, 좀비물을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이시라면 에필로그까지 순식간에 달리실 수 있을 정도로 글이 쏙쏙 들어옵니다.
다른 곳에 연재도 하셨던 작품이라 그런지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글을 다듬으신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눈에 띕니다. 특히 장편의 경우엔 지속적으로 글을 돌아보고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글에는 만족스러운 글을 만들기 위한 작가님의 노력이 보이는 것 같아 더욱 글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은 좀비 아포칼립스물의 기본코스와도 같은 길을 똑바로 걷습니다.
갑작스런 재앙의 발생- 공황상태속에 어찌어찌 기본장비 갖추고 목표지를 정함.- 목표지로 가는 길에 사건을 만나며 동료를 잃거나 동료들 간 반목이 생김.- 갈등 끝에 파국에 이르거나 수습하고 목적지 도착.
이 글의 주인공도 위의 순서로 갑작스럽게 닥친 재앙속에서 일단 목표를 정하고 믿음직한 동료와 함께 길을 나서게 됩니다.
초중반의 빠른 전개에 비하면 중후반에는 발걸음이 조금씩 늦춰지는 경향이 있긴 한데 글의 몰입을 해칠 정도는 아니라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후반부로 가면 주인공이 친한 친구와 서로 의지했던 여성을 잃게 된 후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악몽을 꾸거나 헛것을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반복적이고 비슷한 분위기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다보니 전개가 조금 쳐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주인공이 끔찍한 상황속에서 좀비와 사람을 해쳐가며 생긴 정신적 혼란과 피로감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분량의 조절이 조금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후 작가님은 그런 부분을 더 다듬으시고 세심하게 표현하신 후속작을 공개하셨습니다. 궁금하시면 “엘리 엘리’ 를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은 분위기입니다. ‘잿빛 길’, ‘잿빛 도시’같은 시각적 표현들은 독자가 익히 보았고, 알고 있는 폐허가 된 도시의 분위기를 쉽게 떠올리게 해주어서 작가님이 만들어둔 세상에 쉽게 빠져들 수 있게 해줍니다.
작품의 배경을 ‘거제도’라는 도시로 한정시킨 것도 아포칼립스물의 몰입을 도와주는 훌륭한 선택이지요. 무릇 좀비물의 명작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은 너나할 것없이 한정된 공간을 선호했습니다. 최근엔 세계전쟁 수준으로 스케일이 커진 작품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역시 좀비물은 좁은 공간, 밀폐된 건물 안이나 배, 비행기 같은 곳이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의아했던 부분은 남겨진 사람들의 행동인데요. 도시에 남겨진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약탈자가 되거나 광신집단을 만들거나 하기엔 기간이 좀 짧지 않았나 싶더군요. 지나치게 빨리 좀비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명작으로 꼽히는 ‘새벽의 저주’를 봐도 아포칼립스의 세상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은 등장하기 마련이긴 하지요. 더우기 작가님은 작품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좀비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공포를 더 강조하셨기 때문에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이상한 자문자답을 해 놓았습니다만, 이 작품은 끝까지 눈을 떼지 않게 되는 흡인력을 갖춘 좋은 글입니다.
결말이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이미 초반부에 결말을 위한 복선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걸 깨닫고 감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것이던 나중에 다듬으셨던 간에 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작가님이 만들어놓으신 잿빛길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작가님은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놓은 잿빛 길을 따라 좋은 작품을 계속 내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점점 높은 퀄리티를 보여주시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이 작품도 추천할만 하지만 관심이 있으시다면 작가님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장르소설이다 보니 호불호가 없을 순 없겠지만, 독자분들을 만족시킬 만한 장점을 많이 갖춘 재미있는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