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소개 코멘트처럼 나 역시 SF의 범주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어 누군가 SF라고 이름 붙여놓은 것들을 무작정 읽고 본 것이 이제 3년 즈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SF가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있게 되었느냐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겠지만 적어도 내가 왜 SF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건 미지의 세계로 뻗어나가려 애쓰는 이야기라서다. 유명한 스타트렉 시리즈의 내래이션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다.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알던 세계를 깨부수어야 한다. 또한 나의 세계라 믿고 있던 것을 깨부수려면 그 밑바닥까지 깊숙이 꺼져 들어가 그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주 탐사는 커녕 매일 방구석에만 박혀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이게 아마 모두의 마음 깊숙한 곳에 흩뿌려진 우주의 진리인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SF 장르를 열심히 소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이 묘연한 지혜가 별안간 짠!하고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니 새해에는 우리 모두 SF를 읽읍시다(?).
이 판도라호 프로젝트를 위한 크루를 선별하는 ‘옳은 것인진 모르겠지만 적합한’ 기준이란, 어쩌면 ‘돌아가지 않을’ 이유를 ‘분명하게’ 가진 지원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보았다. 또한 그 ‘돌아가지 않을’ 이유란 대부분 어떤 상실에 기인하고 있으리라는 짐작도 조심스레 덧붙여본다.
최근에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읽은 덕분에 지연과 매디슨의 탐사 임무 과정이 좀 더 생생하게 바로 그려져서 좋았다. 아마 이걸 읽지 않았으면 스크린에서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맷 데이먼의 얼굴을 한 탐사자와 그 손에 든 감자(영화 ‘마션’)에서 상상을 뻗어나가야 했을 테니까. 나도 최근에야 인지하게 된 사실인데, 우리가 우연이든 의지로든 행성 간 이주를 감행하게 되고 도킹 이후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식량 수급 즉, 밭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공기 및 복합적인 대기 조건 등이 보장된다는 전제 하에야 가능한 임무이기는 하지만. 거창하게 말하자면 ‘생존’이자, 동시에 지구인으로서는 시시하게 여기기 쉬운, 먹고 사는 일 말이다.
SF적 세계관에서 탐사의 대상이 되는 ‘미지’의 세계와 존재는 그 ‘미지’의 페이지가 탐사자에게 전부 읽히기 전, 즉 도킹(또는 그 직후) 단계에서 이야기가 종결되는 경향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미지의 상태를 벗어나 앎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되면 우리에겐 또 다른 낯선 세계를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익숙해서 따분한 개인의 삶을 다시금 마주하는 선택지 밖에 남지 않게 되니까.
산다는 건, 어쩌면 내 세계의 시시함과 별 것 없음을 마주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사실 지구에 남은 인간에게든 지극히 낯선 어떤 우주로 나아간 인간에게든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개체 수명을 꼭 채워 산 뒤에 이런 소감을 남길 수 있다면야 ‘오래 살았으니 저 이의 말도 일리가 있다’ 정도의 동의는 받을 수 있으려나? 숨 쉬고 밥 먹고 몸 붙이고 잘 공간을 빌려 건사하는 일에도 힘에 부치는 가운데, 조금만 살만해지면 그새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시시한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만일 지구가 아니라 저 먼 다른 우주로 나아간다고 해도, 먹고 살만해질 무렵이면 다시 또 비슷한 고민으로 귀결하리란 상상을 하면 이 무료함이 조금은 덜어지는 착각이 든다.
그리고 쉽사리 잠기운이 돌지 않는 어느 무료하고도 고요한 밤에는 또각또각 개운하게 손톱을 깎으며, 이렇게도 밤마다 열심히 손톱을 깎는데 여태 내 손톱 갉아먹겠다는 쥐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삶을 부루퉁하게 불평하며, 너무 일찍 중력과 관성을 거슬러 지구를 훌쩍 떠나버린 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떠올려보는 것이다.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