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입니다. 가정용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답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잘 안보시는 분들도 어디선가 몇번은 접해보셨을 클리셰네요.
글의 흐름은 유려하고 도입부의 긴장감도 상당하지만, 아무래도 이야기의 식상함이 뒷목을 서서히 누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만큼 수없이 등장했던 소재입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경우 SF와 호러의 비중이 7 : 3 정도로 무게 배분이 이루어지더군요.
유명한 ‘로봇 3원칙’으로 시작되어 윤리적인 문제, 디스토피아적인 시대상의 묘사를 모두 접하고 나면 굉장히 심오한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많은 작가님들이 고민하셨을 문제지만, 읽는 입장에선 읽어야 하는 다음 페이지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게 느끼게 되는 부분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 독감으로 무거워진 제 머리속을 환하게 밝혀주는 신선한 표현과 뛰어난 문장들이 여기저기서 빛을 냅니다.
주인공은 어느날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의도치않게 그 곳에서 벌어진 지옥도를 목격하게 됩니다.
개복상태로 누워있는 친구와 그걸 보고있는 가정용 안드로이드 엠마. 작가님은 이후에도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엠마의 모습을 더 등장시키는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엠마의 모습은 독자에게 섬뜩한 공포를 안겨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자신을 의심하는 경찰의 눈초리에 불편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TV 드라마를 좋아하던 친구를 떠올리며 설마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되는데…
복선과 반전의 장치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흔적이 많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작가님은 깜짝 놀랄 반전의 결말보다는 서서히 조여드는 공포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신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주인공이 사건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해낸 후부터, 엠마는 제가 최근 본 캐릭터 중 최고의 무서운 악마가 되어 주인공의 숨통을 조여오는데, 이 부분의 긴장감과 몰입도는 정말 최고입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좋다고 생각된 부분은 바로 엠마의 ‘뒷모습’입니다. 이 글에서 엠마는 행동만으로 다양한 공포를 선사하는데,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모습보다 오히려 무엇을 하려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들 사이에 잠시 등장하는 그녀의 뒷모습들(친구를 살해한 후, 주인공을 습격하기 전)이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극도의 공포를 안겨줍니다.
인간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우리와 다른 안드로이드. 조금 전 자신의 친구를 잔인하게 난도질한 그것이 지금 내 앞에서 등을 진 채 칼을 들고 요리를 하고 있다면…
그 모습은 이제 범죄 스릴러의 단골손님이 된 사이코패스와 겹쳐지면서 피부에 확 다가오는 공포를 안겨줍니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사이코패스와는 달리 태생적으로 윤리의식과 양심이 없는 그들의 범죄는 그래서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거겠죠. 저는 이 글에서의 ‘엠마’만큼 그런 부분이 잘 표현된 캐릭터를 최근에 보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서 SF나 호러물에 관심이 없는 독자분들도 거부감없이 완독하실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호러를 좋아하시는 독자분들께는 오랫만에 수작 호러를 접하는 기쁨을 드릴 겁니다. 전 SF를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 합니다. 그래도 이런 SF라면 기쁜 마음으로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군요.
이제 제 악몽에서 항상 등장하던 프레디 크루거나 좀비들 이외에 새 인물이 하나 추가될 것 같습니다.
1인분의 식사를 차려놓고 나를 등진 채 서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그녀 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