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주릴과 세 개의 탑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19년 11월, 조회 182

좋은 이야기들이 꼭 참신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출생의 비밀,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 갈등 속에 성장하는 일행, 예상치 못한 조력자 같은 이야기의 원형은 반지의 제왕에서 해리포터까지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고 그리스 로마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클리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변주되고, 또 가끔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왕도를 걷더라도 품질만 좋으면 어딘지 모르게 손이 가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서사라는 말이 되겠지요. 때로는 무엇을보다도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것이 새삼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주인공 주릴 역시 출생과 외모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현실을 박차고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정격과 파격 사이를 쉴 틈 없이 오갑니다. 스포일러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범하게 생긴(사실은 그냥 그렇다고 주장하는) 주인공은 많지만, 대놓고 흉물스러운 것으로 설정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의 매력 자체가 독자가 이입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인공 주릴의 매력은 내면의 강함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현실의 벽에 부딪치긴 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과 고급 언어, 그리고 (타의로)단련된 정신력이 주인공이 난관을 해쳐가나는 무기입니다. 그 외에 안타깝게도 자주 사용되는 초자연적인 회복능력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독특한 카리스마의 주인공 주릴과 함께하는 또 다른 주인공 네키르엘은 준수한 용모와 상당한 검술 실력을 지녔지만 숙적에 의해 멸문 당한 비극적인 과거로 인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당차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섬세하게 묘사된 낯선 도시와 마을, 숲 속을 여행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소설입니다. 대개는 주인공들에게 즐겁지 않은 상황일 때가 많지만 말입니다.

소설을 감상하든 영화를 감상하든 누구나 주목하는 포인트는 다를 것입니다. 총을 좋아하는 사람은 할로포인트라는 단어만 나와도 심장이 뛸 것이고, 검술에 관심이 있다면 하프소딩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세를 고쳐 앉을 것입니다. 저는 관심사가 다양한 편이긴 하지만 배경이 현실세계가 아니라면 권력구조나 정치체제에 눈을 많이 두는 편입니다. 물론 배경이 현실일 때도 그것은 결국 창조된 현실이고, 특정한 시각을 통해 보면 세상은 개인이나 단체가 가진 힘들의 대립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 어머니와 딸이 말다툼을 벌이는 소설을 쓴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권력의 역동이 있지요. 그런 관계망이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를 볼 때 개인적으로는 기계식 시계를 보는 것 같은 경이를 느낍니다. 현실과는 다르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그럴싸한 세상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이런 장르를 읽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점에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초적인 갈등을 빗는 두 집단, 혹은 힘은 신성과 마법입니다. 다른 나라도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주인공들은 신성 레니아테 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제국의 지배자는 아마도 페러레트 황가와 성상제이며, 교황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영향력이 지대하고, 마녀재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마법은 금기시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아이나힐야를 맞이하는 태도 등으로 볼 때 전반적으로 광신적인 분위기인 것 같은데요, 몇 가지 부분에서 이런 배경에 몰입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습니다.

먼저 주인공의 경우 죽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대충 키워지다가 마녀재판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 도망치는데, 마녀재판은 피렐 수사가 막고 있었지만 후에 드러난 수사의 의도를 생각하면 왜 철만 되면 행사삼아 주릴을 죽이려 드는 마을에 열심히 가르쳐 놓은 주릴을 남겨두었는지가 의문이 남습니다. 어디 수도원이든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을 텐데요. 그리고 피렐은 그냥 수사가 아닌 수도원장이고, 기본적으로 성직자는 귀족인 사회인데(주릴에 의하면 수사는 후작으로 추정됩니다) 왜 마을사람들은 피렐 수사가 얘는 인간이라고 했는데도 자꾸 말을 안 들을까요? 하켄이 누군지도 모르는 고위 귀족(아니지만)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귀족이 만만한 사회는 아닌데 말입니다.

다른 문제는 네키르엘의 멸문과 관련해서, 네키르엘은 본인도 말했다시피 영세하지만 기사 계급이고, 소작을 부치는 땅도 있습니다. 그런데 웬 미친 살인광 하나가 나타나서 가족들이 몰살당했지요. 그러면 왜 도망다니는 걸까요? 베리칫이 쫓아오니까 라고 하기엔 일단 윗선의 다른 귀족이든지한테 사정을 설명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베리칫이 다른 권력과 결탁해서(성격상 그럴성 싶진 않은데) 네키르엘의 가문을 끝장낸 게 아닌 이상 쫓기는 사람은 베리칫이 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15세 금발 미소년을 쫓아다니는 중년남성은 현대사회에서도 돌을 들어 쳐야 마땅하니까요. 그런데 네키르엘 가문의 땅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 걸까요? 소작농들의 소작료 횡령이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

또한 네키르엘은 기사이며, 최소한 스스로 기사 계급의 가치를 내면화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지만 마법과 요정(이 동네에서는 마물이겠지만) 대해서는 너무 넓은 아량을 보여줍니다. 본인이 마법적인 의식에 동참까지 할 정도로요. 생각보다 정교분리가 상당한 사회가 아닌 이상 요정을 만난 기사라면 죽어라 마물놈아 하면서 썰어 죽이려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좀 못생긴 사람이 말 타고 온다고 짱돌을 던지는 (저는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사회에서 네키르엘은 마법에 대한 경계심이 심히 없는 사람입니다. 너무 쉽게 본인이 체인질링이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그래서인지 이 친구는 뒤에 가면 말 좀 잘못했다고 성직자도 줘팹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세계관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신성과 마법의 갈등이, 드문드문 나타나고 있다고는 하나 효과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배계층에 해당하는 등장인물이 별로 등장하지 않다 보니 전체적인 견지에서 세계관을 조망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봅니다. 그나마 핵심계층으로 볼 수 있는 아이나힐야도 제법 근간에야 등장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사실 신력은 별로 쓸데도 없고(그보다도, 그냥 그런 거 없고) 제국은 부패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마법의 기원은 요정들이고 실제로 마법도 존재하는데, 신성의 기원은 무엇이고 어떤 힘이 있는지 역시 의문이 생깁니다. 약간 나온 기도문 내용을 보면 현실의 계시종교와 상당히 유사하긴 한데, 이 종교의 기원은 무엇이고, 어떤 힘으로 마법을 억압해올 수 있었는지 앞으로 밝혀지길 기대합니다.

세계관에 이어서 한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소설적 장치의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주릴은 여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도박을 했고, 덕분에 하켄을 만납니다. 하켄은 오해 끝에 주릴에게 거금을 털리는데, 이것이 베리칫이 주릴 일행의 뒤를 따라붙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매우 당연히 필요한 장치지만 여기에 동원된 하켄의 사고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켄은 특정 지역 무역의 독점을 위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고위 귀족에게 거금을 쥐어준 후 배가 떠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간단한 미행과 감시로 방지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추적자를 고용하는데, 추적자 고용의 기준 역시 애매합니다. 베리칫이 물론 결과적으로 추적도 잘 했지만, 애초에 베리칫이 용병들 중 최고로 손꼽히는 이유는 추적술이 아닌 검술 아닌지요? 세계 최고의 칼잡이가 도망간 여자애 하나 잡아오는데 적절한 인선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사실 베리칫이 원래부터 네키르엘을 찾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별히 하켄에게 고용되어야 할 이유도 모호한 부분입니다. 어차피 지하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하켄도 나중에는 그냥 자력으로 주릴을 잡게 되지요.

하켄은 근간에 들어 또 전개에는 도움이 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운 행동을 보여줍니다. 끔찍하게 죽어야 한다는 이유로 주릴을 사멸에 던져버리라고 하는데요, 덕분에 어차피 가야 했던 한달 반이 걸리는 거리를 주인공은 상자에 들어간 상태로 주파합니다. 그래서 주릴과 네키르엘의 여정이 상당히 단축되긴 하는데, 이것이 과연 좋은 방식인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당연히 이 동네에서 재생자가 흔치는 않을 것인데, 죽이기 어려우니 사막에 갖다 버리라고 하기 보다는 다른 쓸모를 찾는 게 상업인 다운 행보가 아닐지요? 일례로 비슷한 재생력을 가진 무한의 주인의 만지는 그 능력 덕분에 오만가지 생고생을 하지요. 어쨌든 용도는 찾기 나름이지만 사막에 갖다 던지는 것은 어떠한 가치창출도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이런 하켄의 좌충우돌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장치는 주릴의 회복력입니다. 사실 슈퍼맨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로이스 레인이 아니라 크립토나이트지요. 주릴의 내구력이 워낙 좋다 보니 나중에는 네키르엘도 주릴이 고문당하는 동안 상단을 습격하는 건 기사답지 않다는, 뭔가 석연찮은 이유로 시간을 보냅니다. 당연히 주릴이 겪는 시련들에 대해서 읽는 사람도 주릴이 안타깝긴 하지만 긴장감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근간에는 심장이 뽑혀도 어떻게든 돌아왔는데, 이렇게 되면 사실 머리와 몸을 분리해 놓기 전에는 죽음의 위기라는 상황이 와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릴은 고급 지식 보유자에다가 멘탈까지 강하지요(최소한 무의식 레벨 전까지는). 사정상 안 쓰려고 하긴 하지만 마법도 쓸 수 있습니다. 결국 패널티는 외모뿐인데, 가면 하나 쓰면 먼치킨이 탄생할 것 같아 우려됩니다. 결론적으로 재생력이 있기 때문에 심한 고난을 겪어도 빠르게 극복 및 성장하고 다음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급부로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심각성이 퇴색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작가분께서 공개한 몇 가지 정보에 따르면 저는 전체 소설의 절반가량을 읽은 듯합니다. 주릴의 영혼의 동반자(?)인 모쉬나의 정체나, 요정계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 등 지금까지 암시는 되었으나 앞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분의 쓰고자 하는 에너지를 잘 느낄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에피소드를 가지 쳐 나눠서 설명하면 좋았을 내용들이 등장인물에 의해 급하게 서술되는 등 어쩐지 진행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지금보다 호흡을 느리게 가져간다고 해도 내용이 늘어지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고, 완결 후에 다시한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서장에 아르카나 이야기가 나오기에 타로카드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카야가 점을(?) 보는 동안에도 안 나오네요. 오랜만에 뽑아보니 일곱 개의 동전이 나왔습니다. 리뷰가 영 만족스럽지 않은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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