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주인공이 읽고 있던 로맨스 소설의 인물로 깨어난다는 건 꽤 익숙한 설정 같은데 배경이나 여주의 성격, 여주가 벌어려는 일만큼은 익숙치 않은 로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적이시네요, 영애님! 제목부터가 참신합니다. 미술학도 화영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며 5일째 총장실을 점거 중입니다. 농성 중이라 한들 문을 잠그고 들어앉은 학우들이 할만한 일이 없었으므로 화영은 전자책을 읽기로 합니다. 본디 취향은 미술 아니면 역사 쪽이지만 전자책 반값 할인이라는 메리트와 클림트와 에곤 쉴레를 3대 7로 섞어놓은 듯한 표지 그림에 반해 <청야에 지는 별>이라는 로설을 읽게 되는데요. 제정 러시아 말기와도 비슷한 판타지의 가상 세계. 국가 전복을 꿈꾸는 혁명군이 일어나며 황제 일가는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를 지켜보며 서 있는 한 아름다운 여성, 아나스타샤, 황태자비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지요. ‘달아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오.’ 혁명군의 수장 블라디미르는 아나스타샤를 사랑했고 가급적 그녀를 회유하고 싶었으나 남편과 가족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며 아나스타샤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합니다. 눈물을 쏟으며 팔을 뻗는 블라디미르의 손 끝에서 들려온 총성, 뒤를 이어 그녀 몸에 쏟아진 총알로 아나스타샤의 숨이 끊어지는 결말 앞에 화영은 성질이 나는데요. 여주가 죽어서 그러냐고요? 설마요. 반동의 기질이 가득한 화영은 황제 일가의 죽음이 안타깝긴해도 황제나 그 가족을 동정받아 마땅한 존재로 보진 않습니다. 화영이 화가 나는 건 이후 벌어진 혁명군과 정부군의 대립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혁명군의 대응이 넘 미흡했던 거죠. 불평불만 쏟으며 전자책을 끌 적에만 해도 화영은 몰랐습니다. 그 부조리한 세상 속에 설마하니 자신이 눈 뜰 줄이야. 잘생기고 튼튼하고 계급 좋은 남자 몸에서 깨어나도 좋다고 말 못할 판국에 첫사랑 손에 목숨을 잃는 비운의 황태자비 아나스타샤로 눈을 뜨다니!! 그나마 다행인건 아나스타샤의 나이가 아직 15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비극은 족히 16년, 잠깐 헷갈리는데 어쩌면 18년이 지난 후에나 벌어질 것이므로 미래를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다, 황태자비로 간택되기 직전이며 자신은 여전히 백작영애다 생각하고 보니 어쩌면 이거 꿈에도 바라마지 않은 상황이 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혁명! 뜨겁고 강렬한 새시대를 내 손으로 일굴 수 있는 기회!!!
예절은 좀 부족할지 몰라도 글자를 읽고 소화할 수 있으며 학습에 대한 열의에 부족함이 없는 화영은 금방 나스챠(아나스타샤의 애칭)로 분해 살아날 구멍을 모색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6년, 어쩌면 18년을 황태자비가 되는 일에 썩혀 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는 그녀였기에 차근차근 혁명군에 가담할 계획을 세우지요. 화영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아는 유일한 하녀 멜로디를 포섭해 동지가 되고요. 혁명군의 일원으로 삐라를 뿌리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백작가의 비서를 선생님으로 모십니다. 성차별적 문화로 이수할 수 있는 전공에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 화학을 배우겠다는 목표도 세웁니다. 그러기 위해선 화학 선생님을 한분 모셔와야만 하는데 이거이거, 꼰대라고 내친 예절 선생이 알고 보니 그 옛날 화학과의 수석 학생이었다는군요. 반동분자로 체포된 남편으로 인해 전공을 박탈당하고 변방으로 쫓겨났던 그녀가 어떻게 신분세탁을 하고 예절 선생으로 수도에 입성했는지는 의문이나 선생의 밑에서 배움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한차례 다툼이 있었던 그들의 심상치 않은 만남을 예고하며 연재분 14편이 마무리 되요. 화영은 이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소동에서 한발짝 비켜나 이세계의 구경꾼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아래에서 위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꿈꿀 수 없는 뜨거운 혁명의 깃발을 휘두르고 싶다는 것, 피 흘리고 싶다는 것, 그에 대한 충분한 각오와 성찰이 되어있는지는 의문이나 새로운 세계에 몸 던지고픈 열망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었습니다. 화영의 괄목할 성장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