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한국의 조앤 롤링을 찾는다고 광고했죠. 한국 장르 시장이 넓어질 기회가 온 것 같아 기뻤어요. 그래서 세 번째 공모전이 끝날 동안 꼬박꼬박 대상을 탄 작품을 사 읽었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스러웠어요. 방점이 ‘한국의’가 아니라 ‘조앤 롤링’에 찍혀있는 작품들이었거든요. 이미 대성공을 거둔 해리포터 이야기에 한국식 이름이 들어간 듯 했어요. <두억시니의 한>도 같은 느낌이었어요.
<두억시니의 한>은 퇴마사와 귀신이 등장하는 어반 판타지입니다. 이 작품은 장르에게 요구되는 것을 잘 충족했어요. 인간과 초자연적인 존재가 대립하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파생되는 잔혹한 장면과 대사를 삽입함으로써 호러 분위기도 이끌어냈어요. ‘트와일라잇’ 이후 이런 소설이 적어져서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문제는 장르에게 요구되는 것만 충족했다는 거예요.
<두억시니의 한>은 일본 어반 판타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왜 초능력에 그럴 듯한 이름을 붙이고 싸우는 것들 있잖아요. 작품에서 능력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 예를 들면 미래시, 는 일본 어반 판타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인지 <두억시니의 한>은 한국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같지 않아요. 작품에 나오는 지명과 이름을 일본어로 고쳐도 어색하지 않을 거예요.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이 그랬듯 어반 판타지에 방점이 찍혀있으니까요.
작가 입장에서는 억울할 거예요. 굳이 ‘한국의’ 어반 판타지를 쓰려는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실제로 웹소설 시장에서는 <두억시니의 한>처럼 일본 어반 판타지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 버젓이 팔리고 있으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체성이 없는 소설은 매력이 없어요. 비슷한 설정에 비슷한 분위기에 비슷한 재미를 주는 작품은 이미 많아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다고요. 한글로 쓰이고 한국인이 나오는 만큼 한국적인 정체성이 필요해요.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뺀다면 탁월한 면도 있어요. 먼저 주인공 장우호가 탐정에 가까운데 추리물 방향으로 빠지지 않은 것을 칭찬하고 싶어요. 초능력이 존재하는 세계관에서 추리는 재미가 없거든요. 아무리 논리적으로 추리하더라도 초능력의 존재로 인해 여태까지의 과정이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많아서요. <두억시니의 한>에서 추리는 초능력을 설명하고 괜히 늘어질 수 있는 서사를 압축하는 기능으로 쓰여요. 작가가 쉬운 길을 포기하고 다음 장면을 창작해야 하는 어려운 길을 택한 거죠. 이 선택은 옳았습니다. 초능력을 사용하여 희생양을 바로 찾은 장우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호기심이 갔어요.
또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한 방법을 외부에서 끌어오지 않고 작품 내에서 제시된 도구만으로 해결한 것도 좋았어요.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관으로 쓴 단편소설은 마지막쯤 가서 작품에 등장하지 않았던 세계관 인물이 나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하고는 하죠. 작가 입장에서는 세계관을 확장하는 것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개연성이 무너지는 것에 불과해요. 그러나 <두억시니의 한>은 작품 내에서 이야기를 끝내요. 덕분에 깔끔한 단편 소설이 됐어요.
인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장우호는 매력적인 주인공이에요. 나쁜 남자에다 자기 파괴적이거든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 충분한 힘이 있어요. 하지만 감정이입이 무척 어려운 인물이에요. 감정이 널뛰어서 종잡을 수 없거든요. 죽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겁이 많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증오를 원해요. 물론 양립할 수 있는 감정이죠. 작품에서도 ‘감정의 항상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공감하기 어려워요. 우호의 입으로 말하는 경험과 대사는 공감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놈이라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다.”라고 설명하는 것에 가깝거든요. 어쩌면 이것도 일본 장르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로테스크함을 연출하기 위해 공감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행동하는 인물을 배치하는 거요. 상당히 아쉽습니다. 감정 이입하기 어려운 면이 인물이 가진 매력을 떨어뜨려요. 작품의 특성상 공감은 어렵다면 적어도 행동하는 이유(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가 이해됐으면 좋겠어요.
<두억시니의 한>은 좋은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작품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할 줄 알고 힘 있게 이야기를 밀어붙일 줄도 알아요. 고유한 정체성과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이야기에 섞인다면 분명 훌륭한 어반 판타지가 될 거예요. 같은 세계관으로 쓸 다음 작품이 상당히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