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자판기 글귀들을 골라 봤어요.

분류: 수다, 글쓴이: 노말시티, 17년 12월, 댓글20, 읽음: 224

최근에는 글을 거의 읽지 못해 항상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마침 문학자판기 글귀를 모집한다기에 전에 읽었던 글들에서 글귀를 골라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뛰어난 문장을 보는 눈이 없다보니 그냥 이 작품하면 이 문장! 하는 식으로 느낌 가는 대로 골랐어요. 작가님들이 왜 하필 이 문장을… 하면서 뜨악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방에서 나오는 동안 옥희는 석양이 진 마당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얼마 전에 태화와 내가 추던 춤을 흉내 내는 것이다. 그 어설픈 동작이 몹시도 귀여워 우리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사랑손님과 나, 이나경

여자는 더는 경계의 표정 없이 먼 곳을 보았다. 그런 몸짓으로 자신들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그녀는 작은 다툼이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자가 조금 화가 났고, 그래서 잠시 시간을 갖기로 했단다. 그는 지금 다른 곳에, 가까운 모텔에 머물고 있었다.

– 곶자왈에서, 조나단

“내가 둘 중에, 누구를 죽였는지 알아낸다면, 당신은 사는 겁니다.”

– 고속버스, 엄성용

이제 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태풍을 기다리는 어제까지의 순간을 기억해본다. 두렵지만, 기다린 그 순간. 그를 만나는 그 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더는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또 눈물이 난다.

– 폭풍의 집, 배명은

“이 산의 짐승들 태반이 실은 인간이라네. 자네도 그 중 하나지. 호랑이가 된 이유를 설명하라면 그건 나도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네. 세상의 이치를 어찌 다 알겠나.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본래의 물성을 자각하지만 않는다면 자네처럼 심려가 서릴 일도 없거든. 그냥 마음 편히 짐승으로 살다 죽는 거야. 그런 생활도 나쁘지 않아.”

– 전신보, 이나경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숟가락을 놓고, 물을 따르고, 서로서로 비위를 긁지 않을 화제거리를 찾아 주고받는 것은 피곤했다. 싼 거라도 좋았다. 나만을 위한 식사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좋다. 상미는 눈을 감았다. 보글보글, 고추 기름이 뜬 매콤한 찌개국물에, 눈처럼 하얀 두부가 소복히 쌓여, 잔뜩 열을 품은 뜨끈뜨끈한 뚝배기를 가득 채워 잠시 후 여기 놓일 것이다.

– 시청 앞 김밥천국 혼밥클럽, 전혜진

쥐가 지나치게 많은 집에서 쥐들은 늘 굶주렸다. 죽인 쥐를 쥐떼 가운데 던지면 쥐가 쥐를 먹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갔다. 사람도 죽고 쥐도 죽고 사람도 살고 쥐도 살고 사람이 사람을 먹고 쥐가 쥐를 먹는 날들이.

– 서왕, 한켠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것입니다.

– 마리우드 변주곡, 리체르카

“그쪽 쫓아가서 죽이려고 그러는 건데 내가 먼저 가면 어떡합니까?”

– 이화령, montesur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거잖아. 나는”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젖꼭지가 없으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겠구나.

– 남자에게 왜 젖꼭지가 필요한가, 호돌이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세상은 깊은 밤보다 더 어두워진다. 절걱, 절걱, 불길하고도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시우를 비롯한 기지 내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자던 사람마저 깨우는 악몽 같은 소리였다.

– 기계탑, 리체르카

고작 서른의 나이에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기분이란 참으로 미묘했다. 이젠 여분의 인간이 되었구나 절망하는 내가 있었고, 스스로를 폐기한 나 자신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시간은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안으로 말려들었고, 나도 그와 함께 안으로 안으로만 기어들어갔다.

– 게으른 인생, 김이겸

“이미 늦었어.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어.”
그리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글록 17, 모리가와 타로

선충에게 실험에 대해 설명해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아마존 몰리, 이산화

“물아래에서 일종의 신호가 물결치며 올라와요. 그걸 차단했습니다. 시동을 걸고 떠날 준비를 하세요. 어서요. 지금 시동을 걸고 떠나야 합므마마마마마…”

– 바다의 비밀, OldNick

봄밤에 종종 뒤뜰에 나가 잠옷차림으로 혼자 뱅글뱅글 돌며 춤추던 아가씨를, 왜 우리는 납득했던 걸까요.
그 어두운 밤에 홀로 나무 아래에서 까르르 까르르 작은 종이 울리는 것처럼 잘 울리는 소리로 웃던 아가씨를, 왜 다른 이들은 말리지 않았을까요.

– 히긴스 부인의 편지, 번연

“그게 내 잘못이야? 살려 했다고, 살아보려 했다고…… 죽어, 죽으라고 이 쥐새끼.”

– 쥐를 잡아, 조나단

“그 말이야말로 왠지 나에게는 네가 날 끔찍하게 살해하겠다는 복선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아…”

– 범인은 이루다, Rogias

존댓말 부담스러워-! 내 나이 반도 안되는 놈들에게 높임말 고통스러워-!! 칠판에 삐뚤빼뚤한 내 글씨 보기 괴로워-!!!
흰 분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의 어색함이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지유경입니다. 세 달 간 잘 부탁합니다.”

– 지유경 씨의 기묘한 이야기, 번연

이 말이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는 양씨 삼대가 모여있는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 수아의 입양을 걸고 내가 벌인 도박이었다.

– 황금의 유전자, Oo

“드디어 발견했다고오!”
걷어차고 싶을 정도로 화사한 미소였다.

– 모기와 가설, 위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 두렵지 않았어요. 내가 두려웠던 건…… 남아있는 인생을 다 바쳐도 읽을 수 있는 책에 한계가 있다는 그 사실이었지요. 나는, 더 많이 알고 싶고 읽고 싶은데……”

– Bicentennial Bibliophile, 전혜진

왼쪽으로 가르마를 얌전히 타서 머리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길지 않은 머리가 금방 감은 듯이 젖어있었다. 종종머리를 땋은 난아는 역시 환상이었을까? 어쩌면 그새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감고 오기라도 한 걸까?

– 호식총을 찾아 우니, 호인

“그러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냥 동화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약간 풀이 죽어 있던 신부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조금 아이 같은 미소를 띠우면서 방에서 생각해낸 ‘이상한’ 가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무서운 도마뱀, 이산화

투녜츠의 선수부에 새겨진 생선 모양의 졸리 로저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자, 술탄 메메드 다리 위의 시민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해협을 까맣게 봉쇄한 해경의 경비정, 다리 위의 차도를 가득 메운 시민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오르는 한 척의 잠수함…….

– 튜나 크로싱, 오소리

“……사막에 고래 한 마리쯤 있어도 나쁘지 않잖아.”

– 엘센 할림, 오소리

그러자 구역질나는 냄새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비릿하고 시큼한 동시에 깊숙한 데서 무언가 썩고 있는 듯한, 천 개의 무덤이 일제히 열린 것 같은, 미지의 야수가 더운 입김을 뿜어내는 듯한 강렬한 악취가….

– 냄새, 이나경

“부딪치고, 고백하고, 낙담해 봐요. 매번이 처음처럼 고통스럽겠죠. 아프고, 쓰리고, 눈물 날 거예요. 그래도 해봐요.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이번이 첫 경험인 것처럼. 이를 악물고 다시 덤벼들어 봐요.”

– 카산드라들, 장아미

서설이 길었습니다. 제 삶도 한 때 호박색으로 번쩍였으나 그 빛이 사위는 것도 이제 목하에 있으니 미련만 남은 모양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짧은 판타지, 유권조

“그래요. 나랑 같은 천민은 아닌 것 같으니까 저도 존댓말을 해드리죠. 그렇지만,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내 이름은 시오레에요. 엄연히 이름이 있다고요. 부모님이 지어준 건 아니라고 해도 난 내 이름이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 시오레 : 용사의 모험, 유권조

“가끔씩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어.” 그리곤 아주 잠깐 잠자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와 같은 것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듯 했다. 나는 사라진 미소의 흔적을 찾으려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책을 주워 다시 낭독하기 시작했다.

– 잠자는 여왕의 종이 궁전 아래에서, 전견

‘오직 자비로운 광기가 찾아오길!’

– 초월, montesur

“됐어. 언니, 놀라지 마. 얘들 다 알고 왔어.”

– 비공개 안건, Xx

잇자국이라고 불러주고 싶은 마음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눈이 아니라 눈깔이듯이 잇자국이 아니라 이빨 자국이다. 그렇게 부르는 편이 차라리 어울린다.

– 이빨자국, 버터칼

“결국 타임 패러독스를 믿는 게 아니었네요. 타임 패러독스를 믿도록 스스로 세뇌시킨 거지. 그렇게 끔찍한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한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 타임 패러독스를 마음의 방패로 쓴거야. 인지부조화로군.”

– 미래정보이용금지법, 알렉산더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말씀해주세요.”

– 루아님의 작품세계에 대한 리뷰, soha

“이계백과! 난 그 백과만은 완성시켜야 했어! 그 백과는 정말이지 멋진 작품이 될 거야!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신비롭고! 괴이한! 이계와 이계의 존재들을 온전히 드러낸 유일무이한 기록이 될 거야!”

– 이계백과, 소현수

가게 안은 어두웠다. 이른 아침의 낮은 햇살이 카페의 목조가구들에 부딪혀 깨지면서 칙칙한 공기를 조용히 감쌌다. 마스터와 피터는 카운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마스터는 피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피터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향했다.
“이게 뭔지 아는 걸 보니, 어제는 지니와 황홀한 밤을 보냈나 보군.”

– 안녕, 아킬레우스, 달바라기

해가 질 시간이다. 그녀는 근방에서 시야를 가리는 고층 건물이나 구조물이 없는 위치를 잡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썼다. 다행히 늦지 않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연경이 가진 영구기억을 통해 언제나 보고 있는 아름다움. 그녀는 하늘이 샛노랑 섞인 따끈한 주황빛이었다가 형광 물감 풀어놓은 것처럼 화사한 분홍빛으로 물들고, 이내 옅은 보랏빛에서 소담한 청남색으로 싸르르 채워지는 것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단발, 리체르카

자전거가 공중을 날며 운동장 울타리를 넘어가는 순간, 어디선가 끔찍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안 돼! 그와 동시에 울타리 뒤쪽의 덩굴이 뱀처럼 내 발목을 아슬아슬하게 휘감았다. 하지만 온 힘을 실어 페달을 밟았던 가속도 덕분에, 그따위 덩굴 쪼가리로는 나를 멈추기에 역부족이었다.

– 바니호퍼, 갈릭디핑

침묵은 깨졌습니다.

– 위대한 침묵, 달바라기

이렇게 무서운 날이 있을까? 세찬 비에 들이닥쳐 할퀴어대는 홍수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살아남았다. 이 미친 정신병자와 함께, 밀실과도 같은 사면이 물바다인 그 중간, 유일한 육지인 이 공간에서 단 둘이 말이다.

– 홍수, 배명은

봉봉의 뒤통수, 그 뒷머리 머리카락이 스윽 갈라지며 옆으로 밀려났다. 헤어판 모세의 기적 같았다. 연한 복숭아색 두피가 세로로 드러나며 점점 넓어졌다. 두피 안이 울룩불룩했다. 그게 사람의 코와 입술과 연한 광대뼈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순간, 그 얼굴이 쑤욱 솟아났다.

– 신의 사탕, HY

나는 이곳과 이 모습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예감했다. 그러자 그 즉시 이곳과 이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 너의 어제를 노래하며, 최참치

물밑에 난 풀 같은 것이, 그것이, 풀 같은 것이 아니었구나.

– 물귀신, 탱탱

“내 뒤에서라면, 내 눈앞이 아니라면 너희들도 춤춰도 돼. 하지만 내가 뒤돌아볼 것 같으면 빨리 제자리로 가야 돼!”

– 아무도 못 봤어, 조제

“…라고 AI들은 스스로 판단할 것입니다.”

– 16픽셀의 빈틈, 천가을

다행히 상상이었다.

– 쌍커풀 수술, 마약꽃게

2주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버린 꼴이었으니까. 그동안 까뮈의 글을 읽었다면 세 권은 족히 해치울 수 있었을 터였다.

– 도서관 사서 에밀리 힐덴부르크의 우울, BornWriter

제 사춘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 사춘기, 휴안

 

하다 보니 너무 양이 많아 민폐가 아닐까 걱정도 되네요. 그냥 그 동안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들의 홍보라고 생각해 주세요…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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