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끝이다.
내 멘탈과 함께 자존심도 끝이 났다.
빌어먹을- 말아먹은 수능 때도 느끼지 못했던 좌절이 이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갈기냐?!
어디다 한탄할 곳도 없고 한탄할 수도 없고, 자업자득이란 말 외엔 들을 수 있을 말도 없고. 홈페이지에 깽깽거리기엔 곱게 가꿔온 마이홈이 망가지는 꼴 보기 싫어서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혼자 한탄하자. 나는 끝이다.
.
.
라고 생각했는데. 끝이란 건,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을 보여주는 모양이다.
지유경 씨의 기묘한 이야기
– 그러니까, 해줄 수 있지?
“…그게 좀…….”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아니, 지금과 비교하자니 행복한 정도가 아니고 엄청나게 행복했는데!
아니라고, 싫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엔 모친의 시선이 불판 아래 숯불마냥 이글거리고 있는 게 너무 잘 보여서 유경 씨는 잠시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하지만 어차피 무의미한 시도다. 그녀의 성질은 자타공인 더러웠지만 심성은 모질지 못했기에. 같은 과를 졸업한 나이 많은 동기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이 사태가 왔다.
–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실제로 만나서 얘기하는 거라면야 얼굴을 보며 “그렇게 곤란하면 알았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볼게.”라고 할 만한 상황이거늘. 유경 씨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전혀 볼 수 없는 ㅈ언니의 발언은 날카로웠다. 왜 전화기(일반 통화)로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전송할 수 없는가!
심심하지 않다. 집 안에 한 달을 박혀 있어도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쌩쌩한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다면 더 좋다!) 심심할 리가 없다. 산보 범위 안에 도서관도 두 개나 있고, 아파트 입구 쪽엔 DVD 대여점도 있고 못 본 영화들도 많다. 할 일들이 일부러 찾아내지 않아도 무지개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나날이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쓰잘데기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건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될 부분이다. 그런고로, “나는 집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고 바쁘므로 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도 없어 형체를 얻은 불만사항을 씹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경 씨는 꽤 긴 시간을 입 주변 근육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러던 그녀의 근육들이 일순간 전부 반항하듯 움직여 유경 씨는 몸을 크게 뒤로 휘고야 말았다. 모친의 강력한 스파이크 덕이다.
“이놈의 지지배가 널 생각해서 해 준 전화인데 네! 하고 받지는 못할 망정 이리저리 뭘 하기 싫어서…!!”
유경 씨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던지거나 전화기 너머 사람의 고막이 위험하도록 최고출력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은 자신을 잠시나마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의 등짝을 벽을 기는 그리마 같은 꼴로 마구 쓰다듬었다. 뭐, 이해는 되지만, 흉한 몰골이다. 그 흉한 몰골을 추스르지 못한 채 그녀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울부짖었다.
“할게, 할게, 할게!”
– 어, 진짜지? 알았어, 교감 선생님한테 그렇게 얘기한다! 고마워!
통증이 사라지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끊기는 전화를 보며 그녀는 마음 속에서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삼켰다.
“아, 엄마는 왜…….”
기간제라니, 끔찍한 얘기다. 하지만 그 끔찍함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뭐, 왜, 집 나갈래?”
어린 날부터 집귀신인지라 아르바이트 경험 전무. 용돈이라고 불릴 만한 건 인생의 황금기(가족과 떨어져 타지에서 살았으므로 더더욱!)라고 그녀가 당당하게 말하곤 하는 고 3 시절 외엔 딱히 받아본 적이 없고, 그나마도 수능 성적과 비례하듯 바꿔가며 격하게 탕진하여 수중에 돈 전무. 각종 명절에 친척들을 통해 들어오는 각종 수입은 자동으로 모친께 반납. 심지어 인생 몇 번 안되는 과외 경험으로 벌어들인 돈마저 모친께 착착 보내드리기까지 했던지라, 올해 초 과락(科落) 아니면 전부 붙기로 유명한 초등 임용고시에서 미끄러진 그녀는 돈 없는 백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가면 무슨 수단으로 살겠는가.
아닙니다, 말씀 잘 받들겠습니다, 어마마마. 미천한 소인이 집을 나가서 어떻게 살 수 있겠사옵니까? 헤헤헤.
배알 뒤틀려 육성으로 하지 못할 말 대신 불만을 담아 개그만화에서나 묘사될 급으로 입술을 뒤집고, 예이예이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유경 씨는 방으로 사라졌다.
이후 종종, 과 ㅈ언니는 전화나 문자로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었고, 유경 씨는 그렇게 자신이 가야 할 학교, 들어가야 할 학년 반, 아이들의 수, 계약 기간 등등을 알게 되었다.
서글픈 일이다. 교대를 들어간 것도 자의가 아니었거늘, 졸업 후 할 짓도 그녀가 정하지 못하고 정해져 있는 길 하나만 가야 한다니. “나의 영혼은 자유롭고 이것은 나의 영혼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그렇게 투덜거리자 고등학교 때부터 질기게 인연을 이어온 악우(惡友)는 저 자가 미쳐서 배부른 소리한다며 그녀를 외면했다. 몇 남겨놓지도 않은 친구마저 나의 고통을 외면하다니! 그 사실은 유경 씨를 몹시 슬프게 만들어, 그녀는 출근 때 입을 정장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을 연이어 떠올렸다. 정장!
그래,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몹시 고통스럽다. 이런 옷을 입으려면 신을 수 있는 신발 종류도 몇 가지로 한정된다. 계약할 학교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건 좋은데, 전투복(?) 및 전투화가 이런 꼴임에야 그깟 장점 와 닿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옷의 용도는 몸을 보호하는 것이다!]라는 생활 신조에 따라 집에서 막 구르던 자취생 같은 복장으로 슬리퍼 하나 딱딱 끌며 등교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인생의 꽃이라는 대학 시절을 보내는 여대생이 왜 저따위냐는 평가를 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만, 그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어쨌든 옷의 용도는 몸을 보호하는 게 맞잖는가? 겨울엔 청바지, 여름엔 반바지. 치마 왜 필요한가? 몸의 장점을 드러내고 단점을 가릴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속옷만 안 보이면 되지! 하지만 정장이라니-!! 그녀의 자유의지에 치명적 손상이 가해졌다. 그러나 생각은 멈춰지지 않았다. 다음 타자로 떠오른 것은 가방이었다. 정장이면 정장에 맞는 가방이 필요하다. 그 가방이 평소 유경 씨의 가방과 비교하면 그 주인을 절대로 편하게 해주지 않을 것도 몹시 당연하여 그녀는 또 한 번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산 넘어 산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나지 않는 생각이 유경 씨에게 어쩌면 제일 중요할 수도 있을 사실을 하나 일깨워주었다. 유경 씨는 투덜거리며 집 근처 로드샵을 싹싹 뒤져 색조 화장품을 하나씩 구비하기 시작했다. 살며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어 평소 로션도 안 바르고 다니는 그녀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그녀가 미쳐가는 몰골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인터넷 상에서 얼마나 고통을 호소했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법하다.
여튼, 며칠에 걸쳐 서서히 그녀를 말려가며, 그렇게 그 날은 찾아왔다.
* * *
학교 하면 상상할 수 있는 광경이 있다. 교실과, 학생들과, 교무실에 모여 있는 선생님들.
초등, 아니 국민학교 졸업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하고 물어볼 만한 강력한 편견이다.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가? 초등학교엔, 교무실이 없다. 담임의 책상은 교실에 있다. 교실이 담임교사의 교무실이자 작업실이고 수업 공간인 것이다. 초등교사는 항상 숨 쉬듯 반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밥도 같이 먹고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간다! (같이 가고 싶어서 같이 가는 건 물론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십여 년.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초등학교의 추억을 일깨우려 노력하며, 유경 씨는 이 시스템에 혼란을 느꼈다. ㅈ언니는 굳이 교무실에 들러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니, 모여서 인사하는 일 자체가 없다고 했다. 그냥 첫날부터 교실로 출근해야 한다고도 했다.
덕분에 이 시스템에 엄청 낯설어하며 출근했다. 8시 40분까지니까, 8시 반.
도착했으나 도통 뭘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깔끔히 백지상태다. 결국 화장실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하고 절규한 그녀에게 ㅈ언니도 자신의 당혹을 표명해주었다. 사실 소개만 해주었을 뿐이지 언니의 발령지는 이 학교가 아니었으므로 그녀도 그렇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관리자들의 입을 타고 넘어 넘어 온 기간제를 구해달라는 부탁만 충실히 이행했을 뿐.
– 일단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봐. 바탕화면에 담임 선생님이 필요한 정보, 해야 할 일, 출퇴근 시간 등을 다 적어놨다고 하셨어.
“거, 고맙게도 친절한 분이시구만.”
유경 씨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ㅈ언니는 컴퓨터 비밀번호의 위치를 말해준 후 다음에 밥 한 끼 같이 먹자는 상투적인 인사를 날리며 전화를 끊었다. 나름 고등교육(?)을 받은 이 땅의 훌륭한 성인답게 유경 씨는 어떻게든 교실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주의사항과 해야 할 일이 촘촘히 적힌 파일을 열어 읽을 수 있었다. (그놈의 컴퓨터 비밀번호라는 게 포스트잇에 적혀 키보드 아래에 붙어있었고, 유경 씨는 국가(?)의 정보가 이런 식으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황당함을 느꼈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래도 시스템 정말 이상하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이건 아니잖나-
왜 자기 소개를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인지, 이거 너무나도 이상하다!
27명, 54개의 부담스러운 눈들이 그녀의 손동작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 적어도 교장이나 교감, 하다못해 학년부장님이나 옆 반 선생님이 담임 대신 온 누구다- 정도는 얘기해줘야 하지 않나? 마음 속으로 수도 없이 울부짖으며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임시로 5학년 4반 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존댓말 부담스러워-! 내 나이 반도 안되는 놈들에게 높임말 고통스러워-!! 칠판에 삐뚤빼뚤한 내 글씨 보기 괴로워-!!!
흰 분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의 어색함이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지유경입니다. 세 달 간 잘 부탁합니다.”
어떻게든 거기까진 진지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고통을 잘 숨기는 것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유경 씨는 칠판 지우개로 이름 석자를 벅벅 문질러 닦고선 자리에 앉았다.
5학년은 그녀가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마치 중학생인 것 같다. 심지어 몇몇 거대한 아이들은 유경 씨의 키를 가뿐히 넘어 있었다. 얕보이는 건 아닐까, 이런 곳에서 나 잘 버틸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지나가지만 드러낼 순 없다. 그녀는 학생 명부에 눈을 박고 시선을 고정시키며 자신을 제어했고, 새로 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각자 자신의 할 일을 시작했다.
긴 듯 길지 않게 시간이 흘렀다. 1교시 시작종이 쳤고, 사회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유경 씨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사람의 얼굴은 잘 구분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이 이름 주인과 이름을 매치시키는 데엔 영 소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명부를 보고 애들 얼굴을 봐도, 그 놈이 그 놈이다. 명부는 30분도 되지 않아 다 외웠는데 애들 얼굴을 아무리 봐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이름을 외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지만 어차피 세 달 후면 보지 않게 될 텐데 외워서 무엇할 것인가? 3월이면 모를까 이미 4월도 중순, 담임의 규칙을 학습한 아이들은 명백하게 그녀의 제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굳이 신경 써 가며 이름을 외우지 않기로 했다.
“오늘이 15일이니까…, 5번!”
단추는, 그렇게 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