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소설들 – 아르네 뒤켕의 ‘사악한 오망성’에 근거하여 이달의큐레이션

대상작품: <종로의 개> 외 19개 작품
큐레이터: 녹음익, 3월 5일, 조회 113

최근 호러에 관련된 외국 자료를 뒤지다가 벨기에의 호러 영화 감독인 아르네 뒤켕이 1997년에 제창했다는 작품 분류법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뒤켕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은 전무한 수준이지만 (유튜브에 조회수 100 이하인 단편 두 개가 올라와 있는데, 보고 나면 제 망친 작품을 읽는 것처럼 민망한 느낌이 들더군요ㅠㅠ) 분류법 자체는 나름 중22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큐레이션에 응용해볼 수 있겠더군요!

부연하자면, 뒤켕은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스티브 톰슨의 민담 분류법에서 힌트를 얻어 호러 장르로 파악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핵심적인 소재 유형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누는 분류법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류법의 이름을 사악한 오망성이라고 붙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시로 든 작품들은 제 기준으로 특히 재미있었던 작품들을 선별한 것입니다.

 

(1) 사악한 괴물: 이 범주에는 작품의 <호러적 효과에 있어> 독립적인 자아를 지닌 비인간적 존재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작품들이 분류됩니다. 생물이나 심령체(귀신) 외에도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 (HAL이라던가) 또한 이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시우 종로의 개: 괴물의 비쥬얼과 고유한 속성이 잘 버무려져 압도적인 인상을 자아냅니다. 주인공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오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엄길윤 정신강탈자: 통제되지 않는 정신이라는, 강박증의 권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괴물의 특성 자체가 무시무시합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 숨어있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박해수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로봇의 정교한 논리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갔는지를 알게 되면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소름이 돋습니다. 주인에게 헌신적인 로봇이 등장합니다.

이일경 – Vanishing Entity: 다 읽고 그게’ ‘그거였다는 점을 상상해보면, 역겹고 끔찍한 느낌이 듭니다. 독특한 생활사를 가진 병원체가 등장합니다.

김태민원숭이들의 왕: 최후반부 폐건물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정경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괴물의 속성 자체가 스포일러라 언급할 수가 없습니다.

 

(2) 위협적인 물건: ‘자아가 없는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개체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작품들이 속하는 범주입니다. 3번 범주와 혼동하기 쉽지만, 변칙적인 현상이 특정한 기물의 고유한 매커니즘에 의해 야기된다는 게 특징입니다. ‘자아’를 가졌다고 보기 힘든 단순한 컴퓨터 알고리즘도 이 분류에 들어갑니다.

그린레보그 책의 이름은 나폴리탄: 바다냄새 자욱한 책 속의 풍경이 오싹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읽는 사람을 잠시 동안 초차원으로 데리고 가는 책이 등장합니다.

클랜시 김준영마지막 질문: 펜이 칼보다 무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인지를 자극하는 방법에 통달한 인공지능이 등장합니다.

타우민박집에 선풍기가 산다: ‘쩝쩝이라는 의성어가 얼마나 공포스러울 수 있는지…. 후텁지근한 여름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야만성의 표현이 강렬한 작품입니다.

gemcart – 마임맨: 어둡고 광막한 공간에서 인형과 함께 춤추는 이미지가 신선합니다. 행동을 따라 하는 인형이 등장합니다. 마임마임.

사이클론피를 먹는 기계: 기계라는 개념 자체를 코스믹 호러의 소재로 삼는다는 발상이 흥미롭습니다. 플롯이 다소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어두운 굴 안을 헤집는 광포한 기계의 묘사가 뛰어납니다.

 

(3) 적대적인 현상: 정상적인 물리법칙과 유비될 수 있는 초자연적 법칙이 핵심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속하게 되는 범주입니다. 초자연적 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응용과학이라 할 수 있는 주술이나, 신체의 비정상적인 작용에 기인하는 비병원성인 질병 또한 이 범주에 속합니다.

천가을 구멍: 직접적인 묘사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서술 상의 구멍과 같은 지점에서 공포가 만들어집니다.

지현상문 뒤에 지옥이 있다: 공간의 배열을 바꾼 것만으로 폐쇄적인 감각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한없이 확장되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고립된 역설적인 공간이 등장합니다.

노말시티사쿠라코 이야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미스터리한 기조가 일품입니다. 아이를 대상으로 삼는 주술이 등장합니다.

toll – 털가죽: 화자에 의해 기술되는 것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toll님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정신병적인 인상이 극한으로 묘사되는 작품입니다.

유상백귀야행(百鬼夜行): 시적으로 표현된 백귀야행의 정경이 아름답고 으스스합니다. 권선징악을 체현하는 신비로운 현상이 등장합니다.

 

(4) 뒤틀린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에 대해 뒤켕은 <알튀세르를 참조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배경이 부족해 정확한 정의는 아닐지 모르지만, 대충 정동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근원적인 수준의 인지도식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이 범주로 분류되는 소재들은, 거칠게 말하면, 일반인들이 쉽게 공감하기 힘든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이며, 그들이 가진 병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공포의 근원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번연 지식의 신: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오늘날을 반영하는 듯한 핵심인물의 행적이 슬프고 두렵습니다. 고시생 생활의 중압감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인간이 등장합니다.

염소자리 – 13: 결말이 주는 충격이 현실적이고 강렬합니다.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비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호두빙수집 냄새: 분노조절잘해에 근거한 허세가 아니라, 진정으로 빡친 사람의 모습이 서글픕니다. 타인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에 정신적으로 뒤틀려버린 인간이 등장합니다.

사마란 모란: 시대배경과 부조화하는 것 같은 마술적 소재의 활용이 눈길을 끕니다. 정욕에 번민하다 돌아버린 인간이 등장합니다.

위래존은 맛있다: 직장에서 바쁠 때마다 접하게 되는 상황과 유사한 만큼,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깊습니다. 인간을 기능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5) [데이터 말소]

 

 p.s. 

감사하게도 브릿G 큐레이션에 몇 차례 이름이 올라갔었던 터라, 저도 보답 차 큐레이션을 하나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주제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에 뒤켕의 분류법을 알게 되어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 호러 붐 얘기도 간간히 나오는 것 같아서, 브릿G 내의 좋은 호러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 뒤켕의 분류를 한번 적용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