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섞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특히나 힘든 건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관계가 좋다.’, ‘사람이 괜찮다.’라는 말을 듣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죠. 예전엔 인사좀 잘 하고 다른 사람 험담 안 하면서 내가 맡은 일 꾀부리지 않고 하면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사회성을 자꾸 수치화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개인의 잣대로 평가를 하려고 하니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만약에 제가 실제로 만났다면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볼 만한 인간관계, 사회생활의 달인입니다.
스스로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손을 놓은 사람’이라 평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 뒤따르는 결과에 대해 책임을 놓아버리는 정신승리까지 가능한 인물입니다.
저는 직원이 많은 대기업에서 근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고개만 들어도 수 명씩 보이는 자신의 경쟁자들 사이에서 앞서나간다는 건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인 것 같더군요.
주인공은 아마도 그런 압박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기기만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알려지지 않은 지방대 출신에 대단한 스펙도 없는 주인공은 타고난 매력(글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뤄지진 않습니다만, 주인공의 연애사나 빠른 진급등으로 유추해봄직 합니다.) 으로 동기중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인물이고 주변의 평도 좋습니다.
그는 직장내의 경쟁도, 사회적인 위치도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한 언행을 여러번 보이는데, 학창 시절에 시험 전날 곧 죽어도 공부 하나도 안했다고 우기던 전교 1등을 떠올려보면 나름 공통점이 보입니다.
그 당시 1등하던 친구는 그렇게 함으로써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성적 하락의 충격에서 자신을 보호하려 한 것일 테고, 주인공 또한 자신이 어렵지 않게 얻어온 것으로 주변에 비추어지던 성공이 삐끗하는 순간을 항상 대비하는 치밀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작품 내에서도 부장 승진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몇번씩 되뇌이던 그가 인사부장의 반응과 사내의 분위기를 끈질기게 파내고 헤집어서 결국 잠재적인 경쟁자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내는 모습이 친구들 앞에서는 책한번 펴들지 않다가 집에서는 치열하게 밤을 새는 우등생들의 모습과 닮아있다고나 할까요?
물론 그 당시 학생의 심리 상태와 이 글의 주인공이 가지고있는 그것을 동일시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만, 결국 작가님은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가면, 어찌 보면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가슴 뜨끔한 풍자를 담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감히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그가 가진 걸 아마 죽을 때까지 얻기 힘들 거라 예상되는 제가 보기엔 참 얄미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전문점에서 옆자리 여성의 대화를 기억했다가 자신의 상황에 알맞게 대입하고, 그걸 또 자신의 평판에 영향을 주지않는 한도내에서 적절하게 꺼내어 이용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쉽게 해내지 못 할 겁니다.
저도 그렇구요. 그 뿐만이 아니죠. 자신의 행동이 결국은 여러 사람에게 파국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유인의 가면을 다시 만들어 씀으로써, 스스로를 지켜내는 또 한번의 정신승리를 해내게 됩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주인공의 강철같은 이기심과 자기보호능력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로 채워져가는 공동체는 거대한 가면을 모두가 함께 쓰고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가면 뒤의 얼굴을 모두가 알고 있는 채로 벌어지는 가면무도회는 아무래도 흥이 떨어지게 마련이죠.
얼마 전에 아는 지인에게 ‘정치질’ 이라는 신조어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의 주인공이 벌이는 이 블랙코미디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정치질’이 될 것 같네요.
정치가 과연 언제까지 부정적인 의미의 대명사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정치는 제가 잘 모르니 적어도 제가 살고 있는 이 곳만큼은 정치질이 없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글은 미스테리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어떤 사건의 제시와 해결보다는 이야기를 즐기시면서 쭈욱 읽어나가시는 걸 추천합니다. 가독성도 좋고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