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님의 장편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작가의 말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략) 여행자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자면, 오직 나만이 그 세계에 방문했다는, 오직 나만이 그 세계에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글쟁이가 마땅히 배우고 익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세계를 묘사할 때는 내가 쓰고 싶은 풍경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가 그렇게 되어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거라고.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이야기와 풍경은 전부 글쟁이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렇지만 글쟁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풍경이 존재하고, 그 풍경을 의도의 개입 없이 묘사하는 것이 정말 좋은 묘사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족이 길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본 작품 <크툴루 라이징>의 모든 묘사가 나는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작가가 의도대로 스토리를 강압하고 있고, 그 위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들은 주어진 대사를 중얼거리는 배우들 같다. 캐릭터가 의욕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야기도 있지만, 본 작품의 캐릭터들은 어쩐지 의욕이 없다. 다들 축 처져있다.
전체적인 묘사의 분량은 적지 않다. 사실, 내가 즐겨 읽는 장르 소설에 비하면 오히려 묘사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묘사의 명중률이 너무 떨어진다. 독자가 필요로 하는 묘사는 부족하고, 작가가 쓰고 싶은 내용으로 넘쳐난다. 넘쳐나다 못해 폭주한다. 그러한 까닭에 본 작품은 전체적으로 설명적인 논조로 진행된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은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설명을 읽고 싶었다면 아마 제품설명서나 크툴루 도해서, 나무위키 따위를 읽지 않았을까.
물론 독자가 전혀 접해본 적 없는 혹은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설명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글쟁이의 역량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설명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뛰어난 글쟁이는 그 모든 설정을 간단히 보여줌으로써 해결한다. (내가 그렇게 뛰어난 글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가 작품 전체에 팽배하다 보니 서사의 흐름은 대단히 작위적이다. 작가가 목표로 하는 결말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고 할까.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이는 건 대부분 좋은 일이지만, 서사의 흐름은 자연스러웠으면 한다.
정돈되지 않은 시점도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본 작품의 기본적인 시점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관찰자가 자주 바뀌고, 가끔은 관찰자가 전지적인 것처럼 군다. 가령 헤령이 손목을 그었을 때, 무엇으로 그었다는 묘사 없이 곧바로 “무뎌진 식칼로는 뼈를 자를 수 없다.”고 한다. 누군가 이 여자 식칼로 자해했다고 언급해주는 묘사가 있었으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온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객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정돈되지 않은 문장이 아쉽다. 본 작가의 다른 작품 <재림, 니알라토텝>에서 나는 만연하게 흘러가는 작가의 문체가 좋았다. 만연해도 정돈되어있어서 문장의 길이는 작품을 읽어내려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본 작품의 문장들은 정돈되지 않아 산만하다. 아쉬운 일이다.
다만, 러브크래프트와 그의 사후에 정돈된 세계관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춘 독자라면, 위와 같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본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작가의 타겟 독자층이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을 모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있다면, 다른 식의 방법을 강구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