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라는 인형이 있다. 인형은 늘 인간에 의해 끌려다니는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뿐, 능동적으로 행동 할 수 없으나 요나렉님의 단편 <시간이 흘러>에서의 안젤라는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능동적인 인형이다. 가사일 중에서도 ‘주방 보조’가 하는 일에 더 가까웠지만 어느날 안젤라의 기능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어느 날 밤에 일어났다.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는 안젤라.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인형의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소리로 아이를 달래지만 아이는 도무지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죽은 부모를 대신해 아이의 따스한 온기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준다. 아이가 부모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는 아이에게도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아릿하게 다가온다.
‘그 얼굴 잊지 못 해서’
‘돌아올 날만 기다렸어요’
‘내일이라도 웃으면서’
‘다시 또 만나리라 믿었죠’
죽은 에밀리아를 대신해 아이인 에드워드를 달래고, 인형인 자신의 영역을 뛰어넘으면서까지도 안젤라는 에드워드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그런 아릿하고 따스했던, 어쩌면 안젤라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어느새 지나가고 안젤라의 온기를 기대했던 아이는 사라졌다. 아이였던 에드워드는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안젤라와의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아이는 인형 대신 자신의 옆에 있을 사람을 갈구한다. 그가 자라면 자랄수록 안젤라는 점점 더 퇴보된다.
에드워드가 자신을 안을 때 인간의 체온처럼 따스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젤라는 자신의 몸에 물을 부었다. 인형에게 있어서는 물은 상극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에드워드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안젤라.
에드워드에게 있어 안젤라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돌봐준 인형? 친구? 가족?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안젤라에게 소개시켜줬을 때 안젤라가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자 에드워드는 격하게 화를 낸다. 안젤라는 인형인 동시에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결코 그녀가 사람이 아님을 에드워드에게 주지시킨다. 그러나 그는 안젤라가 능동적인 주체로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결국 안젤라가 끼고 있던 반지를 내 던져 버린다.
시간이 흘러 어릴 때처럼 오롯하게 안젤라만을 생각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도 이해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에 의해 자신이 오롯하게 안젤라의 품을 갈구했던 시간을 잊고 더 이상 인형을 돌아보지 않는 인간의 매정함이 느껴진다. 인간의 온기도, 생각도, 많은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던 인형보다 더 자신의 감정을 녹여낼 수 없었음에도 안젤라는 끝까지 에드워드를 품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젤라의 행동에 울컥하게 만든다. 글을 읽을 때도 좋았지만 글을 읽고 나서도 잔상이 많이 남는 단편이었다. 그녀가 내는 기계음이 내내 머릿속에 울려서 한 번 읽고, 다시 반복하여 또 글을 읽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단편에 살을 붙여 장편을 만들어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젤라라는 인형의 성격과 시간이라는 주제의 조합이 좋았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