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주인공 김윤희는 온 식구가 굶어죽는 것보단 낫겠기에 남장을 하고 과거를 치루고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같지 않은, 여자같은 예쁘장한 얼굴의 김윤희는 여러 위험에 처하지만 어찌어찌 다 해결을 합니다. 다음권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 가면 더 많은 위험, 즉 여자라는 걸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요. 처음에는 여타의 남장여주 스토리와 비슷해 보였던 이 시리즈에서 김윤희가 여자라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도 영리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저런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요. 작가인 정은궐은 소설 내에서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지요. 조선 정조 시대의 사대부들에게, 계집이 글자를 알 뿐 아니라 공맹의 도를 알아서 과거에 급제까지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역이라 그렇습니다. 김윤희의 외양이 아무리 여자같고 글씨체도 여자같고 여러 정황들이 여자라는 걸 가리키는데도, 여자인 김윤희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과 다를바 없이 그들의 사고체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여자이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 이는 남자만이 가진 능력입니다. 때문에 김윤희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혹 여자인가?라 의심하던 사람들은 의심을 접어요.
[비정규직 황후]의 에스텔라는 돈 없는 검술 명가 집안의 딸입니다. 어릴때부터 아버지한테 검술을 배웠고,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러 갔다가 호적에 아버지가 자기 이름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쌍둥이 남동생 이름까지 출생신고를 해놨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집안은 거의 망했고 결혼을 할 만한 지참금도 없고….에스텔라는 아버지가 굳이 두 사람으로 출생신고를 해놓은게 이럴때 쓰란 거겠거니 맘대로 해석하고는 남동생으로 변신해 치안 경비대 시험을 치룹니다. 검술 명가인 집안이 자기 대에서 끝나는게 아쉽기는 하지만 만약 아버지가 그런 대물림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후처를 들였거나 데릴사위라도 들였을텐데 그러지 않았고요. 이제 에스텔라는 남자가 되어서 직업을 구했고 일도 쉽고 월급도 괜찮고 돈을 모으면 나중에 어디 먼 곳으로 내려가 다시 여자로 남은 일생을 살 계획입니다. 그녀에게 이런 꿀직장이 없어요. 들키지만 않게 조심하면 됩니다. 적당히, 너무 잘해도 안 되고 너무 못해도 안 되는 정도로만 일을 하지요. 사람들은 출세에 관심이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지요. 저런 명문가의 유일한 아들이 왜 저럴까 의아해하면서요. 그러던 에스텔라 앞에 황태자가 나타나 누나인 척 해서(사람들은 남장한 에스텔라에게 쌍동이 누나가 있다고 알고 있어요) 자신과 약혼 결혼을 해주면 5년 뒤 이혼해서 내보내주고 어마어마한 돈을 주겠다고 제의합니다.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면서 에스텔라는 바로 습격을 받고 각종 암살 위험에 시달립니다. 익숙한 계약연애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한민트 작가가 글로 만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런 깨달음이 옵니다. 왜 에스텔라라고 검으로 정점에 올라보고 싶지 않겠어요? 저렇게 잘하는데. 그렇게 죽도록 노력해서 갖춘 실력인데 왜 마음껏 싸워보고 싶지 않겠어요? 왜? 왜? 왜?…..어떻게 욕심이 없겠어요? 예스텔라도 사람인데요.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의 여주인 이벨린 에레드는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까요. 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개국공신 집안의 아버지와 오빠 셋은 영지의 장정 2천명과 함께 황제가 미끼로 벌인 전투에서 몰살됐고 시체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후계자인 동갑내기 남자 조카는 실종되고요. 마지막 남은 혈통인 7살의 이벨린은, 영주가 되려면 반드시 기사여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이벨린은 기사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벨린이 여자라서 사람들이 싫어할까요? 영주 대리로 영지를 돌보던 할머니는 이벨린을 위해 영지의 많은 자리에 여자를 차근차근 앉힙니다. 이벨린이 영주가 됐을때 여자가 영주를 한다는 게 낯설게 보이지 않게요. 가신들은 이 영특하고 총명한 후계자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영지민들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하루빨리 영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이 넓은 북부 영지의 모든 사람들은 이벨린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벨린은 기사가 된 후 작위를 잇고 영주가 대신 수도의 대학에 입학에 버립니다.
한 번도 뭘하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다. 굳이 꼽자면, 뭘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예를 들면 작위를 잇고 영주가 되는 것이라든가.
왜 저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자신의 고향에서 도망치려고 할까. 처음에는 행방불명된 조카에 대한 죄책감이 아닐까 했는데 읽다보니 그보다는 이벨린이 노력해서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라 혈통 때문에 주어진 자리라서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이 소설은 이벨린의 성장담인데, 한 편으로는 이벨린의 자리 찾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자신이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을 자기 자리 찾기. 아마 이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이벨린이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사고도 치고 하는 부분에서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서로 신분이나 가치관이나 계급은 다르지만 학교 캠퍼스라는 곳만이 줄 수 있는 어떤 유연함, 그러면서도 뻣뻣함, 열정, 공유감, 풋풋함….그래서 이 친구들의 대학생 자체이기만 한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벨린이 기사였기 때문에 [비정규직 황후]를 떠올렸던 것 같고요. 더불어 90년대 김혜린 작가의 [테르미도르] 같은 순정 만화들도 떠올랐고요.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
그 묘한 깨달음의 이벨린을 실없이 웃게 했다. 거기가 집이다. 세트론은 내가 오직 나 자신으로 부딪혀 얻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되, 그 ‘나 자신’ 안에는 나셀의 영주관을 집으로 여긴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서 도망쳤지만, 그곳을 집으로 여기는 사람, 그것도 나다.
[잊힌 신이 내리는 계절]은 이벨린을 포함한 다섯 청년의 성장담이기도 하면서 뛰어난 정치물이기도 합니다. 궁중 암투물로도 느껴졌고, 사실 흥행을 위해서 궁중 암투물로 홍보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도 잠깐 했어요.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들의 정치적 야심과 물밑 싸움이 흥미진진해요.
더불어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 생생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벨린을 끊임없이 잡아당기는 북부에 대한 묘사가 한 번에 쭉 이어지기 보다는 문득문득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처럼 곳곳에 끼어듭니다. 이 끼어듬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아름다우면서 슬픕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가족의 죽음에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 그들의 억울함 분노 고통 희망 같은 것들이 하나의 커다란 울림이 되어 독자를 그 땅으로 끌어들이는 듯 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너무나 탁월합니다. 수도인 센트론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부분 역시 굉장하고요. 정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일상이 자연스럽게 상상될 정도입니다. 미시사 공부를 많이 하신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아참, GL도 나오는데 끈적끈적 두근두근해요 후후.
한참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 1부가 끝났고 아직 가야할 길이 꽤 남은 것 같습니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도 많고 더 전면적으로 드러날 사람들도 많겠고요. 그런데도 요 며칠 아주 열심히 읽었고, 지금까지 연재된 부분만으로도 제가 브릿G 들어와서 읽은 장단편 소설 중 역대급으로 재밌어요. 정말이지 아주 탁월합니다.
쓸 말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이쯤 적으니 생각나질 않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