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사라지고 남겨진 피해자들과 상흔의 오발탄과 같은 분노와 혐오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훼손자들 (작가: 혜바라기, 작품정보)
리뷰어: 랜돌프23, 19년 9월, 조회 81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

이 장르에 대한 저의 식견이 넓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작품을 찾아보다가 어느 날 저에게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이 있었습니다. 네이버 웹툰의 ‘모래인간’작가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였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본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의 서사구조는 좀비 사태가 발발하고, 그로 인해 붕괴되어가는 사회와 문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안에서 생존을 위해 생존자들이 협력하여 작은 사회를 만들어 갈등을 겪거나, 혼자서 어떤 딜레마에 봉착하여 괴로워하는 고군분투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좀비 사태의 시작과 그 한복판만을 다룬 것이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좀비사태가 끝나고 난 이후>의 사회의 모습은 어떨지는 생각을 안 했었습니다. 마치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에서 <공주와 왕자가 결혼해서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을까?>라는 현실적인 물음을 던져본 적 없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백신이 개발되고 좀비사태가 해결되기만 한다면 해피엔딩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 점에서 좀비 사태가 이미 끝나고, 백신으로 인해 좀비였다가 치료된 사람들이 사회 속으로 섞여 들어가며, 그리고 망가진 사회와 문명을 복구하며 일어나는 부작용과 엄청난 사회적 비용, 그리고 남겨진 트라우마와 책임론을 다루는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웹툰의 내용은 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신선한 자극이었고요. 그리고 이것도 아주 매력적이고, 또 새롭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당당한 한 하위 장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비라는 소재를 이용해, 다른 시각에서 다가가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다른 방식으로 반영하고 풍자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요컨대, ‘포스트 좀비 아포칼립스’인 것이죠. 이미 사태가 끝나고 난 뒤, 예전과는 결코 같지 않은 현재의 사회의 모습, 너무나 매력적인 소재 아닙니까?

 

혜바라기 님의 <훼손자들>이라는 소설도 이와 같은 풍의 포스트 좀비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좀비 사태가 끝나고 난 뒤, 부산특구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장르에는 당연하게 따라오는 문제기는 하지만, 주제 자체가 좀비 사태가 끝난 이후를 다루다보니, 좀비 사태가 어떻게 발발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레이션으로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는 언급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태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든,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고, 그래서 다들 대략 어떤 일을 겪으며 어떤 경험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어떤 정서가 퍼져있는지를 독자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과거의 사건들을 파편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 제공해줘야 하는 겁니다. 이거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지나치면 작위적인 설명이 너무 길어지고 정보가 많아져 지루하고 피로해질 수 있고, 또 너무 파편적이고 양이 적으면 불친절하고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되어서 몰입이 안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훼손자들>은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잘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배경을 설명하려다보니 초반에서 중반까지 가는 동안에 (특히나 등장인물 수나 활동범위의 규모가 크기 않다보니) 서술과 대화의 진행이 조금 급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좀비 사태에 대해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적당히 끊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상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좀비 사태가 터질 때 다들 ‘좀비’가 뭔지 이미 대중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좀비물의 유행인지, 요즘엔 이런 식의 전개가 많더라고요. 좀비라는 게 뭔지 모르고 다들 되게 낯선 존재인 것처럼 놀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과 똑같이 ‘좀비’를 다룬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는 잔뜩 나와있어서 다들 그게 뭔지 알고, 다만 작중 현실에서 ‘좀비’ 혹은 ‘그와 비슷한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좀비’라고 칭하는 전개 말입니다. 이젠 좀비가 너무 친숙한 존재가 되어버려서 작중에서 다들 ‘좀비’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면 현실과 너무 괴리가 있어 몰입이 안 되어서일까요? 나름 좀비물의 재미있는 경향 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좀비 사태의 원인을 굳이 언급하거나 만들지 않은 것도 좋았습니다. 내용에 따라 이게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소설에서 좀비 사태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걸 모르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킵니다.(이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만약 좀비 사태의 원인까지 애매하게 끼어들었다면 주제 의식이 흐려졌을 것 같은데, 중심을 잘 잡은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운 건, 마지막에 사건의 진상이 빠르게 밝혀지면서 매듭이 급하게 지어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가지고 보다 템포를 느긋하게 해서(음모가 밝혀지는 속도를 좀 더 천천히 해서), 보다 풍부한 사건과 인물들의 상호작용을 넣어서, 후반부를 장편으로 만들어졌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장편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이 소설이 그만큼 길었더라도 저는 읽었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흥미롭고 주어진 사건들과 내던지는 주제의식이 묵직하고 인상 깊었습니다.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 소설은 여러가지로 씁쓸한 사회의 일면을 좀비 사태라는 우회적인 비유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제목에서도 썼듯이 ‘가해자가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를 묻습니다. ‘내가 이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이 잔인하게 느껴지지요.

우선,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좀비 사태의 원인’을 모릅니다. 정부 주도의 생화학 무기 개발 중 유출사고인지, 어떤 미친 과학자가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어 테러를 저지른 것인지, 신의 벌인지, 진화론에 따르는 자연의 흐름의 일부에 불과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비극의 시작을 탓할 근본적인 누군가, 즉 원흉을 따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제 표면적이면서도 가장 직접적인 가해자인 좀비에게로 화살을 돌립니다. 내가 알던 세상을 망가뜨리고, 사회와 문명을 무너뜨리며,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알던 사람들을 모두 잃게 만든 좀비들. 그런데 기가 막힐 노릇인 게, 백신으로 인해 공격성이 사라진 좀비들은 좀비가 되기 전 인간으로 돌아와버렸고, 좀비였을 때의 기억은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좀비라는 소재의 굉장히 흥미롭고 또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좀비가 가해자이긴 하지만, 문제는 좀비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감염되어 만들어지는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좀비도 한 때 사람이었다’라는 이젠 식상한 이 특징이 이 장르에선 무엇보다도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결국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좀비도 사실은 좀비에게 물린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좀비였을 때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다시 원래의 자아로 돌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선 생존자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처참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좀비 사태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다가, 물렸고, 깨어나보니 몸은 시체와 같고 멀쩡한 사람들은 들이닥쳐 자신이 한때 좀비였다며 책임을 묻습니다.

백신이 해피엔딩을 선물해주지 못 하고, 좀비는 사라졌는데 여전히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물어뜯는>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이번엔 좀비가 아닌 사람이 좀비였던 사람들을요. 이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이 비통하고 안타까우면서 참혹한 심정은 아마 ‘피해자가 같은 처지의, 그러나 더 약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공격하는 사회’가 낯설지 않아서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공격하는 피해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가해자는 증발해버렸습니다. 원흉도 모르고, 세상을 헤집어 놓은 가해자들은 바닥에 뿌려놓은 알코올마냥 증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피해자들은 그 어디에도 책임을 묻지도 못 하고 울분을 해소하지도 못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도 못 합니다. 그들에게 ‘이들도 한때 사람이었으니 용서해라’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여 씨 아저씨의 말이 재훈에게 들리지 않는 건, 재훈에게 용서와 포용은 아직 너무나 이른 가치였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목표물을 잃고 오발탄처럼 튀어나간 과거의 상흔(傷痕)은 분노와 혐오로 변해,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판단으로, 눈앞에 존재하는 ‘좀비였던 존재들’에게 쏟아집니다. 이성적으로는 ‘현재 그들은 좀비가 아니라는 것=현재의 그들에게 죄와 책임이 없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머리에서 생각한 게 바로 가슴으로 내려와 실천이 되나요? 울분에 찬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들에게 오로지 ‘가해자’라는 프레임을 씌웁니다. 감정이 이성을 압도합니다.(재훈의 도가 좀 지나치다싶은 혐오발언은 이를 잘 대변합니다) 쏟아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었다’가 저지르는 죄(작중의 ‘혐오살인’이라 이름 붙은 범죄)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지만요.

한편으로는 한때 좀비였던 그들, 말하자면 ‘훼손자들’은 쏟아지는 혐오와 분노, 억압과 폭력이 억울하기만 합니다. 부당하다고 느낍니다. 이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똑같이 좀비에게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인데, 운좋게 <물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죽이지 않고 살려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불만이 많다’는 식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낮은 취급을 하고 공격하며 심지어 살해하는(=물어뜯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생존자들이 영락없는 가해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해석 중 하나입니다만,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제목에 쓰인 ‘훼손자’라는 표현도 퍽 의미심장합니다. 일단 ‘좀비(였던 사람)’ 대신에 쓰이는 우회 표현이라는 걸 생각하면 ‘(신체가) 훼손(된) 자’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또 다르게 보면, 흔히 우리가 ‘파괴자’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처럼 ‘(다른 대상을) 훼손(하는/한) 자’ 혹은 ‘(사회를) 훼손(하는) 자’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훼손자’라는 용어는 좀비였던 사람들의 이러한 이중적인 처지를 드러내주는 명칭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타자화하여 분류했다는 점에서, 사회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건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생존자들 사이에서 같은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어 분열되고, 좀비 사태가 끝났지만,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 한 채 모두가 과거에 발이 묶여있습니다. 생존자들에게 훼손자들은 한때의 가해자였고, 훼손자들에게 생존자들은 현재의 가해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것이죠. 그렇게 상처를 서로 보듬지 못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난 곳을 끊임없이 더 깊이 파내어 생채기를 냅니다. 인류는 좀비 그 자체가 아니라, 좀비가 남긴 상처가 곪아 썩어들어가서, 그리고 좀비와 좀비 사태를 이용하는 자들에 의해서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받습니다.

 

동화처럼 세상이 선과 악으로 나뉘고, 언제나 선과 악만이 충돌하여 싸우고, 가해자와 악당이 명확하고 분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보다 더 잔인한 현실의 물음을 던집니다. 피해와 후유증은 여전한데, 가해자가 사라졌거나,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도통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해자들을 어떻게 감싸안고 치유해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을 그렇게 조롱하고 공격을 할까요? 또, 왜 피해자들조차 자기보다 더 약한 피해자에게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는 걸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주제 의식을 살려서 보다 깊이 있게 소설이 쓰였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만족과 기대 섞인 아쉬움을 표해봅니다. 설정과 표현이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전개 속도를 조절하고, 보다 더 입체적인 인물과 풍부한 사건의 배치가 이루어진다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씁쓸한 맛이 잔뜩 배어나오는 잔혹 우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흠… 제 자신의 글도 장편으로 못 쓰면서 너무 이것 저것 요구사항이 많았군요.

 

오랜만에 이런 종류의 좀비물을 봐서 반가웠고, 즐거웠습니다. 좀비사태 이후라는 너무나 낯선 배경 속에서 너무나 친숙한 사회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그 오싹함과 섬뜩함이 쉽게 가시질 않네요.

부족한 리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설 쓰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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