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런 이야기를 마음의 빈틈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특히 일본에서 유행하는 형식인데요.
마음의 빈틈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나 히로인의 마음 속 시덥잖은 문제가 현실적 괴물 같은 것으로 실체화됩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방황하면, 더 폭주하고 위험해집니다. 내적인 문제가 외적인 문제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렇기에 고민을 해결하지 않으면, 괴물도 물리칠 수가 없고요. 거꾸로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으면 괴물도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등진 소년의 사랑
이 주인공에게 마음에 어떤 빈틈… 아니 균열이 생긴 걸까요? 세상이 덧없다는 겁니다. 주인공, 사신은 한 교사가 던졌던 말을 계속 곱씹습니다. 첫 문장이기도 하죠.
“너희들은 소모품이야.”
“그러니 적당히 살다가 죽어버려. 아니 너희들은 살 가치조차 없어. 왜냐하면 너희한테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꿈도 희망도 미래도. 아무 것도”
처음엔 무한 경쟁 대한민국 같은 게 떠오릅니다. 당장은 학원물 같고 죽기를 바라는 최상위권 소년, 사신이 있습니다. 사신은 그래서 영원한 것을 찍기 위해 캠코더를 들고 헤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앤젤과 만나게 됩니다. 귀찮은 금발 미소녀죠. 이 전형적인 보이밋 걸 전개를 읽다보면, 독자는 학원 로맨스를 기대하게 됩니다.1 마음의 균열을 조금씩 치유해가면서 두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어느새 대균열 속 구상병기로
작가님은 여러 설정들을 꽁꽁 숨겨놓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꺼내서 보여주십니다. 항상 마지막에 클리프 행어2를 걸어두시죠. 1화 마지막에서 세상을 멸망시킨 대균열에 대해 알려주고요. 2화에서는 침식자와 바퀴벌레가 등장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5화 마지막에서 앤젤이 죽어버리는 걸 시작으로, 이 학교와 세상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대균열로 멸망해가는 아포칼립스입니다. 침식자는 물론 갈고리발톱이라는 무서운 괴물이 인간을 위협합니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학생들은 군인이자 소모품으로 길러지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구상병기라는… 마음의 상상을 실체화하는 무기로 괴물에 맞섭니다. 주인공의 성적 역시 그저 무기로서 얼마나 유능한지 평가한 것일 뿐이었죠.
첫 문장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주인공의 고민은 염세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고민이었죠. 정말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는 아포칼립스니까요. 행복한 학원물스러운 미래는 멸망하고 있는 걸요. 모든 학생들은 방사능으로 불임이 되었다는 묘사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더욱이 사신은 엔젤의 사랑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됩니다.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게 아닐까 하고요.
마음의 균열을 채워줄 사랑
이야기는 빠르게 끝으로 치닫습니다. 갑자기 모든 학교도 고민도 대균열 속으로 붕괴해버립니다. 사신은 거대 갈고리 발톱 괴물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죽어버린 엔젤의 목소리가 들려오죠.
사신은 어느새 깨닫습니다. 사신이 집착으로 죽은 벤쉬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냈듯… 이 거대한 괴물과 균열은 자기가 만들어냈다는 걸요.3 엔젤이 죽었는데도 소모품으로 여길 뿐인 학교에 대한 분노가 구상화된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답을 찾습니다. 모든 미래를 멸망시킬 내 집착과 환상을 스스로 부수기로 결심하죠. 결국 거대 갈고리 발톱을 죽여버립니다.
엔젤의 그리고 엔젤이 남긴 카메라를 봅니다. 엔젤의 사랑은 진실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런 엔젤은 영원하리라 믿으며 다시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별처럼 격렬하게 뜨겁게 빛을 내며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면서요.
게다가 대균열의 생존자가 “여기 있”다는 것이 계속 암시되고요. 이 아포칼립스에도 희망은 남은 채로 끝납니다.
결론 : 마음의 빈틈에 대한 메타 소설 하지만… 여자 없는 남자 이야기
마음의 빈틈 이야기는 마음의 고민을 현실적인 괴물이나 재앙으로 만듭니다. 그러면서 이 고통은 내 상상이 아니라 진짜 현실적인 것이라 호소하죠. 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몰입하지만… 현실이 정말 그렇게 재앙적이기만 하던가요.
이 소설이 말하듯 그런 재앙은 어느 정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끝내면 됩니다. 더 이상 내 빈틈을 비극처럼 보지만 않으면,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계 : 여전한 여자 없는 남자 이야기
여자 없는 남자 이야기는 마음의 빈틈이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것인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죽었거나, 딸이 죽었거나, 여자친구가 죽었거나… 죽을 예정인 그런 이야기들이요.
그래서 남자 주인공은 현재 속에서 우울하게 아름다운 과거를 곱씹거나, 집착적으로 과거나 미래를 바꾸려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여자를 죽이거나,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어서 남자 주인공 동기나 성장의 도구로 삼는 이야기죠. 여성은 오로지 남자의 시점에서 평면적이고 낭만적으로 묘사됩니다. 남자가 여자랑 싸웠거나 싫어했을 수도 있지만 그건 후회를 더하는 기법입니다.
여자가 죽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살인범에게 죽거나, 비행기 사고로 죽거나, 시간선 속에서 죽을 운명이거나…
죽음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하는데요. 진짜 죽는 경우도 많지만, 정신적으로 죽거나, 성적으로 죽기도 합니다. 여주인공이 강간당했거나 강간 당할 뻔한 과거가 있다는 그런 식으로요.
엔젤은 주인공을 조건 없이 사랑해줍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줄 사람은 찾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공평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지자면 남자 중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죠. 저는 아직도 엔젤이 사신을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눈에 반한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요. 자기를 밀어내는데도 달라붙는 사람은 더더욱 못 봤습니다. 여자에게도 누구에게도 힘들고 지치는 일입니다.
엔젤 혼자만이 주인공에게 힘이 되어줬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세카이계라고도 하죠. 하지만 현실은 소중한 두 사람만의 관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걸 마음 먹는 대로 해결할 수 있는 영웅도 아닙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직장 동료도 있습니다. 보고 싶기도 보기 싫기도 한 이런 사람들과 협력하고 갈등을 풀어가야지 대균열도 헤쳐나가겠죠.
엔젤은 죽어버리고 주인공은 모두가 분노해주길 바랬죠. 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을 죽인 건 누구일까요? 주인공의 분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 경우는 없습니다. 가해자가 될 때도 많습니다. 매니악 같은 악당만 가득한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매니악과 몰카 사건은 읽으면서 불쾌했습니다. 굳이 이런 장면을 넣어야 했을까요? 이것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까요?
한계2 : 던져놓고 설명하기
주제말고도 소설 형식 자체도 이야기해볼만 합니다. 익숙한 일상 속에 갑자기 아포칼립스적인 설정이 등장할 때… 복선이 착실하게 깔려 있었지만 당황스러운 때가 더 많았습니다. 특히 침식자가 갑자기 나타나고 선생님이 죽는 부분이 특히 몰입이 많이 깨졌습니다. 학원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죽는다니…
클리프 행어가 나올 때도 그렇습니다. 특히 갑작스럽게 앤젤이 죽을 때 몰입을 깨트렸습니다. 그 뒤에 가서 갈고리발톱이나 앤젤이 하던 임무에 대해 설명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질러 놓고 나중에 가서 설명하는 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급전개라고도 할 수 있겠죠. 순식간에 학교는 무너지고, 괴물 나타나고,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고요. 마지막에는 멋들어진 독백도 합니다. 주제를 설교조로 말해버리죠.4 이 역시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보이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설정을 조금씩 차근차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고요. 설명조보다는 앤젤의 마지막 통신 기록 같이 자연스러운 맥락 속에서 보여준 점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 괴물과 청소년 병기라는 소재는 에반게리온부터 시작해 익숙한 클리셰인 만큼… 굳이 학원물에서 시작해서 놀라게 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리뷰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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