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없는 거대 로봇물의 매력 비평

대상작품: 바닷가의 모리유 (작가: 이주영, 작품정보)
리뷰어: 랜돌프23, 19년 7월, 조회 66

거대 로봇이 나와서 외계 적, 혹은 그 외의 괴수와 같은 종류와 맞서싸우는 장르는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장르이다. 그리고 이런 장르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전투신이 내용 전개의 핵심 중 하나라는 것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된다. (나 또한 <에반게리온>의 팬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기존의 틀과 문법을 과감하게 부정한다. 전투신 없는 거대 로봇물이라니… 하지만 본 소설은 그 과감함으로 인해 읽는 이로 하여금 실망하게 만들지 않는다.

 

처음에 읽으면서 상당히 깊게 들어와 독자로 하여금 다소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익숙치 않은 용어들이 훅하고 튀어나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무엇과 싸우는 건지 당장은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글을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이 소설 안에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에 거부감 없이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난 뒤의 일상의 단면을 엿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과장되지 않고 담담한 배경 설명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장점은 인물들간의 미묘한 인간관계와 심리 묘사다. 이게 가장 탁월하며, 이 소설의 흡입력의 주요 원동력이라 생각된다. 정말로 살아움직이는 것 같은 생생한 인물들의 성격과 표현들 덕에 머릿속에서 이들의 행동이 힘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그려진다. 그러나 ‘묘사가 탁월하다는 것’은 ‘묘사가 노골적인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의 관계나 심리는 기름종이 뒤에 비친 상(像)처럼 언뜻언뜻 비칠 뿐이다. 독자는 그걸 읽으면서 대략 짐작을 해나간다. 하지만 그렇게해서 짐작한 결과물이 작가가 의도하였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독자에게 생각의 여유와 여지를 남겨주면서 의도에 포섭하는 것,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또한 로봇과의 관계도 지금까지 나온 ‘로망’의 틀로 멋있고, 화려하고, 압도적인 크기로 승부하지 않는다. 애초에 만화와 달리 소설로 거대 로봇물을 쓴다는 건 상당한 디메리트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 웅장하고 멋있는 모습을 직접 보여줄 수가 없다니, 하지만 길고 자세한 묘사는 독자를 지치게 할 우려도 있다. 라이트 노벨이 아닌 이상 개성있는 수많은 로봇들을 소설에 등장시키기란 어려운 일이고, 거대 로봇물의 인기 요인이 그러한 개성 있는 로봇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려운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로봇은 그러한 외관에 집중된 매력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과 정서적 교감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거대하고 외계인과 싸울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이라는 두루뭉술한 이미지만 있을 뿐, 하나의 인격체처럼 나온다. 직접적인 활약 같은 건 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나면 ‘위대한 마리유’나 ‘마하’와 같은 로봇의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며 기억에 남는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가 거대 로봇물이라는 틀 안에서 펼쳐진다. 물론 전투가 없을 뿐, 인류의 종말을 목도한 것과 같은 암울한 배경 속의 군데군데 긴장이 팽배한 일상과 전투 직전까지 고조되는 분위기는 인상깊다. 하지만 이건 로봇의 싸움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사람과 사람간의 이야기다. 이런 장르에 전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을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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