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삼의 <원고지>에서는 끊임없이 원고 작업에 시달리는 교수와 그 가족이 등장합니다. 교수의 옷은 원고지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의 직업인 원고 작성을 표현한 모양새입니다. 그의 허리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습니다. 마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새 같습니다. 가족들은 교수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기만 합니다. 교수와 가족은 불통의 상태입니다.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뭔가를 요구하는 아이의 모양새 같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불통과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상징하는 요소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은 오늘 날과 떨어진 요소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향해 바쁘게 살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벗어나면, 게으른 사람. 그리고 낙오자, 패배자라는 수식어를 안은 채 살아가는 무언의 죄책감을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거기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린 채 떠돌아다니는 모양새를 갖기도 합니다.
공허하게 텅 빈 존재. 공허감은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하나의 요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명랑한 좀비’란 제목이 가져다 주는 의미가 그리 낯설진 않습니다. 좀비 영화가 가져다 주는 광적이고 집착적인 좀비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길을 잃어버리고 공허함에 떠돌아다니는 이미지가 묘하게 좀비와 어울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움직이는 시체란 의미의 좀비가 현대인과 묘하게 접목되는 건 기분 탓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이 작품의 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현대 사회에서 부리나케 살아가려 애쓰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살아나가기 위해 두들기는 초창기의 모습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태우는 현대인의 애환이 눈물이 나는 모습 같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은 썩 좋진 않습니다. 쌀은 떨어졌으며, 심지어 그녀가 사는 반지하의 돈도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죠. 실험 도우미라는 정체 불명의 일에 지원한 걸로 보아 그녀가 제대로 된 일을 갖진 못한 걸로 보입니다. 명랑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러면서 좀비란 의미는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실험 도우미로 지원한 실험은 간단합니다. 그녀에게 좀비가 되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좀비가 되어 가는 과정을 어떻게 풀어갈 지 과정을 보면 독특했습니다. 맥박이 없는 시체 같지만 이성을 갖는 존재. 어찌보면 광적이고, 이성이 없는 존재 같던 이전 좀비 클리셰를 깨는 과정이 독특합니다. 그러면서 현대인을 오묘하게 은유한 게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직무를 맡은 와중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탈진하는 현상입니다. 번아웃이 극한으로 차오르게 되면 정신적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 노동자는 이직이나 직장을 방황하게 된다는 어떤 칼럼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은서의 처지는 마치 번아웃 증후군이 좀비 현상으로 발현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삶의 피폐함을 느끼고 실험 도우미로 남들이 미쳤다 욕하는 좀비가 되는 걸 기꺼이 승낙한 그녀의 선택이 안쓰러움을 넘어 미묘함을 드러냅니다.
은서는 이 좀비가 되는 약의 이름을 ‘심청’이라 지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공양미 삼백 석에 아버지의 눈을 떴으면 좋겠듯. 그녀가 돈 때문에 좀비의 길을 택한 건 뒤에서 ‘어떤 사정’이 드러나게 됩니다.(스포일러이니 글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은서에겐 그저 어떤 명분이 필요했다 생각합니다. 은서를 좀비로 이끌게 만들었던 건 그저 힘든 사회의 삶에 의해 피폐해진 공허함에 도피하고 싶었던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제 의견이니 작가님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명랑한 좀비가 되자>는 어찌 보면 씁쓸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어찌 보면 무언가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긴장감도 느껴지진 않습니다. 담담하면서 차분한 느낌이 조금 소름이 돋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칼날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은서가 왜 좀비가 되어야 했는가. 그리고 그녀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동정까지는 못 해 주더라도 우리는 감정의 이입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작품을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