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 상흔은 깊든 얇든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문학에서도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극적이면서, 때로는 전후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소시민으로 표현해 나가리라 생각됩니다.
<벤지 이야기>는 다이쇼 세대라는 일본 사회의 황금기에 태어나, 전쟁, 그리고 현대 사회를 살아 온 벤지란 인물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여러 풍파를 거치며 살아온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는 주위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비슷한 예로 영화 <국제시장>을 볼 수 있습니다. 6.25부터 산업화 시대를 다룬 세대의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이야기가 독특한 건 일본사회를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전후 일본 사회를 다룬 작품으로는 <맨발의 겐>이나 요코미조 세이지의 추리소설을 통해 접한 바 있습니다. 전자는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 일어난 극렬하게 적나라한 참상을 다루었고, 후자는 무너져가는 일본의 구체제와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추리와 접목시켰다는 점입니다. <벤지 이야기>의 상황이 전후의 어려움에만 국한 된 건 아니지만 그가 살아온 세상의 일부는 광기와 혼란, 그리고 혼돈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벤지의 삶은 담담하게 흘러갑니다. 제가 앞에서 보았던 분위기와는 굉장히 천천히 흘러가죠. 마치 조용한 카페에 들어와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 느낌입니다. 벤지는 다이쇼 세대에 태어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문학의 시대이고 문화가 꽃피는 일본의 전성기에 대한 자부심이겠죠.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이 시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며 절규하고 방황합니다.
그의 혼란스러움과 방황은 전쟁이란 시기에 더욱 증폭된다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잡히지 않는 방황의 시기에서 군에 징집해 전쟁에 나가 본 참상은 문화인이란 자부심과 충돌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을 겁니다. 전쟁에 대한 광기, 혼돈, 그리고 증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정체성까지 흔드는 거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에서 그의 시련이 함축적이면서 짤막하게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벤지의 삶은 여러 색깔의 물감이 뒤섞인 거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모에 대한 원초적 연민, 그리고 문화인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세월을 악착같이 살아온 자신.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마치 술이 숙성되듯 그만의 색깔이 나온 느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손자 다로에게 넘겼던 유산은 벤지의 삶을 상징하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흔히 사회의 풍파가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기도 되바꿔 놓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체제에 순응해 흑화되어 버리기도 하는 인물도 있죠. 가령 일본의 1960년대를 다룬 애니메이션 <인랑>도 체제에 결국 굴복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며 씁쓸함을 남겨주기도 합니다.
벤지는 어땠을까요? 물론 그 역시 모든 걸 간직하고만 살진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시대의 풍파를 맞으면서도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보여준 마지막의 유쾌함은 그만이 갖고 있는 문화인으로서 던져주는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잠깐 가던 길을 멈춰 뒤를 돌아 담담히 길을 돌아보아 되짚어보는 유쾌한 회고록 같은 느낌의 작품입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듣는 담담함이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