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노후”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박형서 작가의 소설인데 노인 인구가 폭발하는 근미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 책의 젊은이들은 노년을 혐오합니다. 국가는 혐오를 넘어 노년층에 대한 증오를 안고 제도적으로 살인법을 마련합니다. 국민들은 모르는 오로지 정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만이 결속된 이 법 속에서 국민연금을 수령할 나이가 된 노인들이 소리소문 없이 죽어가지요. 젊은이들은 본인 또한 늙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듯 생각합니다. 노친네들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는 일도 없이 사회의 자본을 축내는 버러지들 같으니. 어째서 우리 사회가 젊지 않은 것들과도 공존해야 하는 거야 화를 내지요. 옆집 노인이 소리소문 없이 죽었다 하면 그건 슬픈 일이 아니라 차라리 잘된 일이며 실은 어떻게 죽었는지 따위 관심도 없는 게 그 소설 속 젊은이들의 평균치였습니다. 당신의 노후 속 주인공 장길도 또한 젊어서는 국민연금의 외곽공무원으로 연금 수령자가 된 1급 살해대상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그 자신과 아내 또한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만 79세(소설 속의 설정이 그러할 뿐 현재 국민연금의 수령 나이가 이렇게 높진 않습니다)가 되는 날이 올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지요. 닥치고 보니 그 나이가 실은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79세에도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친구와 놀고 맛있는 사과를 먹고 내일을 계획하고 하루하루가 행복하더란 말입니다. 죽고 싶지가 않더란 말입니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우주만큼이나 오래오래 살고 싶었던 남자 장길도와 그의 좌절을 보며 처음으로 노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글로써 노후를, 노년을 생각하게 된 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제목의 적나라함에 공감과 불편함이 오고가며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2018년의 청춘을 지나 이제 일흔도 넘어버린 양가 할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버스에서 진상을 부리는 (누군가의 시선에선 삶의 불편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생선 파는 할아버지를 보며 젊은 양가는 생각했었단 말이지요.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추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노년이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무례한 언동을 하지 않으려 했고 누구처럼 목청을 높여 떠들지도 않았거니와 깨끗한 옷차림을 유지하고 젊은이들이 보아 진상으로 느낄만한 언사를 하지 않았나 자기반성에도 열심입니다. 늙음이 그저 늙음으로 적대되는 것이 아니라 늙음 속에 어떤 이유로 하대받는 것이라고 양가 할아버지는 생각했던 걸지도 모릅니다만 현실이 그리 녹녹치 않음을 깨달은 어느 날에 무너지듯 주저 앉아 회상하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했던 각오와 각오의 밑바닥에 깔렸던 경멸의 감각, 그 감각이 전신을 두드리는 고통을 말이지요.
에어팟 실버의 소재 하나로 노년에 대해 노년에 대한 젊은이들의 몰이해에 대해 이만큼 고민하게 만드는 작가님의 감각이 톡톡 튑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참 오만한 말을 저도 거리낌없이 지껄이던 때가 있었기에 소설을 보며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늙는다는 게 뭔지 실감은 커녕 추측도 가지 않았던 때였다고 부끄러운 고백을 해봅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젊고 내 부모님 또한 언제까지나 정정할 것 같은 지금의 시간도 찰나겠지요. 눈덩이처럼 쌓인 시간 뒤에서도 부모님의 노후와 나의 노년이 평탄하기를. 젊음 세대와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상처받고 비통해하기 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시기가 있음을 기억하고 포용하기를. 그러나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많은 이해와 존경 속에서 당신의 노후 우리들의 노후가 아름답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 소설을 읽으며 집중력이 깨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양가나 정씨 같은 호칭이 나올 때였어요. 2018년에 청년이었던 이들이 나이를 먹었다고 양가, 정가, 김씨, 이씨라고 서로를 부르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제가 나이를 먹는다고 제 친구나 제 이웃한 여자를 함안댁, 양평댁 이렇게 부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