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이나 글을 쓸 때에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이 잘 드러났을까. 문장의 맞춤법이 잘 지켜졌는가 하는 내부적인 고민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 중 하나는 남에게 내놓았을 때 그걸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입니다. 많은 창작가들과 작가들이 고민을 하고 문장을 수도 없이 고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수많은 글 하나에 가치를 일일이 매길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자가 만든 글 하나에는 그 사람의 영혼과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좋고 나쁘고를 함부로 매길 수 없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심지어 7살짜리가 만든 글이라도 부모님에게는 명필이 쓴 글 안 부러울 수 있는 거죠. 즉 모든 이야기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고 그게 독자에게 좋다면 그건 좋은 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죽은 언니의 소설을 읽는다>는 지금은 이 세상이 아닌 언니의 소설을 동생이 읽어나가면서 담담하게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언니는 소설을 썼습니다. 글의 묘사로 볼 때 언니는 전문적인 전업작가는 아닙니다. 동생이 보기에도 언니의 소설은 그리 볼품이 있진 않습니다. 뭔가 불완전한 인물들과 그 인물의 심리가 소설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심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글을 읽어나가면서 눈여겨 볼 점은 동생이 중얼거리는 말들입니다. 마치 언니의 심리를 따라가듯 독백하는 동생의 말들입니다. 볼품없고 유치하지만 그걸 읽어나가면서 동생은 언니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을 가는 느낌을 줍니다. 유치하며 우울한 느낌의 소설을 읽어나가며 언니의 ‘우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우울감을 설명해 주는 요소는 이 글에서 드러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그걸 ‘조각난 언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언니의 소설은 완결이 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녀의 소설은 위로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야기 합니다. 우울증이란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소설이라는 소재로 위로를 삼아 왔지만 스스로에 대한 위로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소설의 완결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완결이 난다면 위로는 끝나버리는 두려움이라 생각되지 않았을까요? 동생은 그런 언니를 ‘거짓말쟁이’라 부릅니다. 어쩌면 소설의 허구성과 묘하게 접해지는 부분 같습니다.
결국 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언니의 심리는 작품을 읽어나가며 진지하게 곱씹는 동생의 독백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글은 위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니가 자신의 위로 이상의 가치를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생이 그 작품을 발견하고 그걸 읽어주었기 때문이니까요. 비록 완벽한 서사나 치밀한 구성을 가진 작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동생을 움직이는 무언가는 그 작품 안에 담겨 있습니다.
<죽은 언니의 소설을 읽는다>의 언니는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녀는 우울했고 그 우울함을 그저 토해냈든 글로 풀어내었을 겁니다. 비록 그녀의 소설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동생에게 던지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언니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언니가 그렇다 해서 가치 없는 인간은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