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아니라 대학살.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작가: 너울, 작품정보)
리뷰어: 우연과 상상, 19년 5월, 조회 191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대학살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 맨>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JTBC의 앵커브리핑 “호모 헌드레드”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6pl3g34Xk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단어는 일상에서도 쉽게 듣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 말을 가장 자주 들었던 건 역시 탄핵정국 때가 아니었나 싶다. 연일 촛불시위와 태극기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리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과오를 두고 거친 고성이 오갔으며 누군가는 실패한 국정에 책임을 져야만 했었다.

정치적 대립은 본질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으므로 상대 세력을 비방하기 위해 그 어떠한 혐오적 표현도 손쉽게 등장하곤 한다. 태극기 집회의 노년들은 사그러드는 불꽃에 종종 비유되었고 실상 탄핵을 막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는 걸 지금의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그럼에도 집회세력은 놀라울만큼 필사적이었으며, 그렇기에 외려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차라리 위협적인 상대였다면 그 시기,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고성을 지르는 어버이들이 덜 초라한 인상으로 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남지 못했고, 때문에 나와 내 친구들은 증오스러운 표현 대신에 ‘난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다소 모호하고 특정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언어로 그들을 평했다.

 

이 소설을 읽은 대다수의 독자가 ‘버스 앞에서 비린내나는 카트를 끌고 주저 앉은 노인’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화자로 하여금 비슷한 상황을 겪도록 연출하여 이전에 등장한 노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도록 설득한다. 이어팟을 끼고 정장을 입더라도, 먼 세대의 후손들에게 우리는 ‘틀딱’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버스운행과 개정법률공포조차 익숙치 않은 노년이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건 어떠한 의미일까. 불과 100년 전만해도 이 땅에는 왕이 있었다. 이는 곧 삼성동의 저택 앞에서 절을 하며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 불충한 소신을 꾸짖어달라는 노년의 이미지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들은 어떤 시대에 정체되어 있는 것인지, 우리가 무얼 남기고 여기까지 왔는지 자문하게 된다.

 

노년의 정체가 과연 젊은 세대만의 잘못인가라는 물음은 충분히 생길 수 있다. 미디어에서 연일 곱게 늙지 못한 노년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나는 몇 년 전, 의경으로 복무했던 친구가 내게 쏟아냈던 불평을 기억하고 있다. 세종시 청사에서 근무했던 친구는 연일 이어진 청사 앞의 시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는 문득 시위의 주체가 궁금했고, 친구에게 시위집단이 노년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국회의 예산심사소위에서 보훈처에 보복성 예산삭감을 행한 문제로 재향군인회의 노인들이 반발을 했다고 한다. 삭감당한 예산 중 일부가 퇴역 군인의 복지에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청사 앞으로 내몬 것이다. 당시 극장가엔 <국제시장>이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뒤였고, 말이 많았던 15년도 대종상영화제에서 10관왕의 영애를 안은 때였다.

그러나, 청사 앞에서 보훈처 예산 삭감의 문제를 두고 시위를 벌이는 노년과 ‘이 고생을 후손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서 참 다행’이라고 말하는 영화 사이의 간극에는 내가 이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이질감이 있었다. 영화에서 황정민은 고작 자신의 방에서 가족사진을 끌어안고 오열할 뿐이지만, 지금도 달동네의 반지하 밑에선 생활고와 지병에 겹쳐 고독사하는 노년이 가득하다. 이들이 당면한 재난을 어떻게 ‘다행’이라는 단어로 묻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비극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후손이 아니라 스스로가 겪어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영화 국제시장 속 황정민의 이미지가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군부독재 시기 동안 파병과 이주노동에 시달린 노년이 오늘날 심각한 수준의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착취라고 표현하기에 무리가 없다. 이들의 종착역은 태극기 집회였다. 2만원의 일당과 모종의 소속감을 대가로 누군가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관제시위에 나섰던 이들은 보훈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서 있는 노년들의 또다른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오래 전 태극기집회의 노년들을 보며 읊조렸던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말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들을 착취했던 행위에는 내 책임이 없을 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룩해온 경제적 성장의 결과를 내가 향유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 국제시장과 매서운 겨울날 청사 앞에서 시위를 하던 노인들의 간극이 종종 떠오를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저들을 저렇게 늙게 두어도 괜찮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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