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결국 To.와 From.이 전부일지도 몰라요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선우에게 (작가: 정재4444, 작품정보)
리뷰어: 소윤, 19년 4월, 조회 116

앞에 붙이는 사족: 『선우에게』는 노량진 일타강사 최준영 – 이 호칭은 생각보다도 그의 정체성에 크리티컬한 요소다 – 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국가고시 수험생인 조선우에게 일주일 간 보낸 편지들의 모음이다. 편지가 전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날 죽이려고 한다,’ 목숨이 걸린 이야기에는 긴장감이 차고 넘친다. 최준영은 치밀하면서도 불같은 인물이고 그가 불안, 분노, 의심에 휩싸여 적어내려간 편지들은 독자에게 강력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숨쉴 틈 없이 묵직하고 치열한 글이 부담스럽다면, 이 글이 독자가 아닌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남들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으로 최준영과 조선우의 관계를 생각해 보며 스리슬쩍 읽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것이다.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리뷰에서 스포를 피하지 못할 것 같으니 읽고 와주세요!

 

 

 

 

 

1. 노량진

수험생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애타는 존재입니다. 전 고등학교 내내 나름 공부 잘 하는 모범-우등생이었고 욕심도 많아서 정말 온 정신을 쏟아 입시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 대학에 진학하고 몇 년 지난 후에야,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다 그 애가 수능 직전에 심하게 아파 시험을 못 보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 몰랐어요. 인생에 친구가 단 한 명이라면 그 앤데, 그런 사람의 상처에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은 꽤나 묵직했습니다. 차라리 저보다 친구가 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 고3은 그럴 수밖에 없다면서, 안됐으면 재수했겠지 뭐.

그것들이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와 공기를 만들어낸다. 엇나간 비장함과 불안감이 여기저기 가득 차 있다.

사실 막상 –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 이루고 나면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어도 그렇게 많은 것을 버려가며 매달릴 퀘스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만큼 과도하게 붙들어서 성공한 후에야 그 부당함에 눈길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는 아이러니는 강력합니다. 그 부조리가 집적되어있는 공간, 그 중에서도 수험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주인공에게 엇나간 욕망과 집착이 응축되는 것은 씁쓸하리만치 적절합니다.

 

2. 선우에게

하지만 결국 노량진이라는 공간이 주는 독특한 에너지는 배경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준영과 선우 사이에 오가는 편지들이 있습니다. 이 관계가 작품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준영의 편집증적 의심이 일으키는 다른 인물들, 그러니까 송 선생, 세경, 아랫집 가족들과의 관계 속 사건들은 사실 모두 부차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까 고민했을 때, 내가 고민한 것은 이 이야기를 하느냐 마느냐였지 누군가는 진작에 너였다. 너는 나의 가장 오래되고 가까운 벗이자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간이다. 나는 너에게 이 세계를 사는 법을 배웠다. (…) 이제 이 이야기의 운명은 완전히 너에게 달렸다.

이야기의 운명이 선우에게 달렸다는 것은 선우가 단순히 준영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청자, 그것도 준영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일 뿐인 청자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애초에 그렇다면 작품을 편지 형식으로 구성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준영에게 선우는 ‘세계를 사는 법,’ 그러니까 모두를 의심하고 먼저 행동하며 “공포에 떠느니 공포를 주는” 태도를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그런 선우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스승에게 자신의 성장을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일까요? 선우-스승을 누르고 승리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려는 충동의 발현일까요? 구체적인 이론화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작품의 결말을 안 채로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면 준영의 모든 행동에는 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준영이 선우에게 이 모든 사건을 그렇게 세세하게 전달하는 것은 친구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의심)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요소로 회귀하는 것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준영이 선우의 악랄한 세상살이법에 흑화한 피해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우는 정말 평범하고 도덕관념 확고한 고시생인데 준영이 혼자 땅파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오로지 준영의 편지 일곱 통과 선우의 답장 한 통이고, 그 중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내용이 거짓이나 과장인지 판단할 객관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독자가 해야 하는 일은 트릭과 오해를 뚫고 객관적 진실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준영이 왜 선우에게, 선우가 왜 준영에게 이런 말들을 했는지를 읽어내 보는 작업일 겁니다. 이래서 화자를 신뢰할 수 없는 글이 즐거워요.

 

 

p.s. 읽기 즐거운 작품 써 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디까지가 합리적인 의심이고 어디서부터가 망상일지, 편지를 쓰는 준영의 머리 뒤편에는 어떤 생각과 의도가 스치고 있을지 질문을 던지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좋은 말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무언가 덧붙일 말을 찾자면, 선-사족에 언급했다시피 작품이 전반적으로 무거울 뿐 아니라 (다크한 측면에서도, 스피디한 사건진행보다는 준영의 치열한 심리상태에 대한 복잡한 묘사가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측면에서도.) 긴장감이 높은 수준에서 약간씩 하강하고 상승하고 있어서 독자에게 어느 정도의 부담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제 취향과 능력 탓이지 일부러 이런 분위기로 쓰인 것이 정체성인 작품들도 많으니 흘려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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