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객관적인 리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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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노력만 가상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릭터, 플롯, 세계관 모두 이해하기 쉽고 즐기기는 더 쉽습니다. ‘판타지’와 ‘군상극’ 모두 진입 장벽이 상당한 장르인 걸 생각하면 이는 엄청난 장점입니다. 많은 분이 이 작품을 즐겁게 읽은 것도 이러한 가벼움에 기인하겠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적어도 제게 마녀강림은 재미와 공허함을 동시에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분명 재미는 있는데 만족스럽진 못했습니다. 단지 취향 문제라고 하기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괴리감이 있어요. 그것도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괴리감이요.
세계관
세계관은 좋게 말하면 친근하고 나쁘게 말하면 단순합니다. 흔히 아는 오크 나오고 고블린 나오고 오우거가 우엉! 하는 세상에 생명, 죽음 시간 등을 대변(?)하는 마녀가 조미료처럼 뿌려져 있죠. 조미료 쪽도 이젠 흔한 소재라는 점이 걸리지만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 작품에서 중요한 소재는 ‘시간’이니까요.
작중 묘사되는 ‘시간의 마녀, 샤르나티’의 힘은 제법 흥미롭습니다. 루다의 시계 에피소드도 처음엔 ‘이게 뭔 뻔한 스토리야?’ 하다가 인형 킬레아가 시커먼 눈 번쩍! 하는 거 보고 후다닥 몰입했습니다. 티드메의 음식 이야기나 멜브로사의 시간납치(?) 등도 흥미를 돋웠고요.
2% 아쉬운 ‘시간’이라는 소재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작중 나오는 ‘시간’이라는 소재 활용이 클리셰의 겉을 핥는 데 그칩니다. 평행세계나 타임패러독스 같은 개념은 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이미 질리도록 사용된 소재죠. 작중 배경이 판타지라서 참신하게 느껴질 뿐, 한발 물러서서 보면 다 어디서 본 이야기입니다. 작중 비중이 생각보다 크지 않고요. 즉, ‘판타지’와 ‘시간’이라는 소재를 잘 버무리는 것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해내지 못한 느낌이에요.
시간 다음으로 중요한 소재인 주인공 ‘리소 셀가브’의 정체성도 뭔가 애매합니다. 기억상실, 나눠진 인격, 그녀를 인형으로 삼으려는 마녀의 계획. 흥미롭기보다는 스토리 진행을 위한 편리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 정도로도 사람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만, 그 이상을 바라는게 욕심은 아니겠지요. 특히 ‘시간’이라는 중심 소재와 ‘리소 셀가브’와의 연결고리가 확연히 느껴지지 않은게 아쉬웠습니다.
(비슷한 소재와 장르를 가진 ‘리제로’에서는 시간 되돌리기가 주인공의 정체성이며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요 소재임과 동시에 작중 최고의 떡밥이죠. 반면 마녀강림에서 부각되는 리소의 능력은 용도 단칼에 베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강함 뿐입니다.)
마법이 너무 강해서는 안된다?
삼류 판타지 소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마법을 너무 강력하게 설정한다는 것이다. 군대 전체를 몰살시켜 버릴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와 마녀와 마도사가 있는데, 거기다 또 군대를 만들어 놓는다! 말도 안 된다. 만 명의 병력을 눈깜짝할새에 죽일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누가 만 명을 모으려 하겠나.
얼음과 불의 노래 작가인 조지 마틴 옹의 말씀입니다. 마녀강림에서도 마법은 무지막지하게 강하게 묘사됩니다. 전격이나 화염, 폭우는 기본에 말 그대로 ‘피를 태워버리는’ 멜브로사의 지옥불. 오우거의 공격도 거뜬히 막아내는 방어막에 반경 20미터를 숨도 못 쉬게 묶어버리는 중력필드(?), 수천 단위 병력을 하루아침에 좀비로 살려내는 사령술, 수백에 이르는 화살을 그대로 적군 머리에 되돌려버리는 공간왜곡에 이제는 일상(?!)처럼 쓴다는 순간이동까지. 다른 작품이라면 하나만 나와도 전장을 지배할 치트키들이 마구 난무합니다. 화려하고 볼거리 많은 게 좋은 의미로 할리우드 CG 같죠.
하지만 화려함이 화려함에 그쳐선 안 될 일입니다. 자타공인 고증왕 역덕후인 마틴 옹은 순간이동 하나만 봐도 피를 토하시겠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마법이 ‘강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저 강하고 화려하고 쓸모 가득한 마법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게 문제죠.
실제 중세 전쟁에선 순간이동이나 지옥불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먼 거리에서 시차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수정구슬만 있어도 세계정복에 나설 수 있죠. 하지만 마녀강림에서 묘사되는 전략전술은 ‘지옥불 피우기VS폭우로 불 끄기’가 전부 입니다. 순간이동, 공간왜곡, 중력필드, 시간여행 모두 ‘강력’하게 묘사될 뿐 영리하게 ‘활용’되진 못했습니다. 2부부터 용도 나오고 흑마법도 나오며 점점 볼거리가 늘어가지만 심심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눈은 즐거운데 머리가 즐겁지 않아요.
제 마음속 영원한 걸작인 새 시리즈에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 후반부에 나오는 제2차 대확장 전쟁과 피를 마시는 새 중반을 장식하는 발케네 전쟁이 그것이죠. 둘 다 중세 세계관에 ‘마법’에 가까운 힘과 역사적 고증, 거기에 작가의 영리함까지 들어가면 얼마나 멋진 전투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제 덕심을 한껏 담아 외치겠습니다. 꼭 봐보세요!
캐릭터
등장인물 전원이 좋은 의미로 가볍습니다. 그나마 무게감 있는 리소도 감정선이 어렵지 않아 따라가기 쉽습니다. 이는 작가님이 바라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에 아주 잘 맞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상한 말이기도 합니다. 군상극은 태생부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니거든요.
군상극?
마녀강림에 달린 해시태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단어는 군상극입니다.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을 해도 될 캐릭터들이 세탁기 속 빨래처럼 뒤얽히며 희극과 비극을 자아내는 초–고난이도 장르죠. 읽기도 힘들고 쓰기는 지옥 같습니다. 그래서 잘 쓴 군상극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죠. 그래서 기대도 컸습니다. 당장 저도 군상극 비슷한 작품을 쓰고 있기에 집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웬걸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이 작품은 군상극이 아닙니다. 애초에 군상극일 이유도 없어요. 캐릭터는 필요 이상으로 많고 플롯은 그 캐릭터를 모두 담아내지 못할 만큼 단순하기 때문이죠. 비유하자면 새장 크기에 비해 새가 너무 많습니다.
캐릭터는 만드는 것만큼이나 없애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작중 등장하는 마법사가 마녀를 제외하고도 7명인데(맞죠!?), 적어도 2부까지는 루다와 프레미 그리고 멜브로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필요합니다. 헤르다이트는 스토리상 아예 없어도 되는 인물이고 대마법사 드레노사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면 족합니다. 촌스러운 대사 뱉는 언데드 영감도 말 없는 시체인형으로 묘사되는 편이 더 섬뜩했을 것 같고요.
그 외에도 제레미의 중대장 시절 과거를 읊어주기 위해 나타난 마빈과 덤으로 나온 킥스, 제레미의 진짜 정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호세핀과 케이모, 그 호세핀을 위해 만들어진 시타, 둘이 구분도 안되는 클리셰 악역인 나로겔과 르찰디, 그 나로겔과 르찰디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파이렐과 쿠버, 술셔틀 로닐. 그리고 대체 왜 등장한지 모를 은등급 용병단 삼인방까지……. 너무 많아서 다 기억도 안나네요.
이들 모두 첫인상은 괜찮은 캐릭터입니다. 작가님이 목표하신 ‘가벼운’ 이야기의 등장인물로는 좋아요. 문제는 아무리 가볍다 해도 중심 주제, 소재와 엮이지 못하면 아예 없애거나 다른 캐릭터와 합치는 게 낫습니다. 작중 인물 대부분이 중심 이야기(리소 셀가브와 마녀 샤르나티)에 도통 섞이질 못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보여주는 시점 카메라 역할만 할 때가 많죠. 그 결과 이야기가 산만해지고요. 설정을 설명해야 한다면 캐릭터를 또 만들기보다 적당한 플롯을 짜시는 게 더 좋습니다.
공들여 만든 캐릭터가 아까우실 테지만 이 작품은 기획부터 군상극이 아닙니다. 리소와 제레미라는 누가 봐도 명백한 주인공이 있고, 대중이 받아들이기 편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플롯도 리소 이야기를 제외하면 단순합니다. 다른 군상극, 이를테면 얼불노나 피마새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관, 플롯을 가지고 있어서 등장인물도 많이 필요하죠. 하지만 이 작품은 아닙니다. 리소와 제레미 그리고 세릭, 루다, 티드메에게만 집중해도 충분히 중심서사가 진행됩니다. 캐릭터가 줄면 시점에 덜 튀는 만큼 몰입되고 주연의 감정 묘사에도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갈무리하면 가벼우면서도 깊이 있는 소설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물론 나리타 료고의 작품처럼 단순한 세계관에 캐릭터만 넘치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리타의 캐릭터는 모두 깊고 입체적이죠. 그래서 캐릭터만으로도 서사가 힘을 얻고요.)
(그래도 차렌 누님은 멋졌습니다.)
최대 피해자 제레미
캐릭터가 너무 많아 벌어지는 또 다른 문제는 주연 캐릭터의 감정선이 얕다는 겁니다. 리소는 분량도 많고 묘사도 깊지만 다른 주인공인 제레미는 심각할 정도로 얕습니다. 제가 아는 제레미는 아무런 내적갈등 없이 세릭만 죽이려 드는 바보 개그캐입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그가 세릭을 죽이려는 이유에 어떤 공감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한번 붙어보고 싶어서? 그런 호승심을 가진 사람이 전장 한가운데에서 화살 저격을 하나요? 보는 눈이 최소 수십인 건 어떻게 하고요! 아니, 애초에 최강의 기사단장을 전장 한가운데에서 암살하는 지령을 곧이듣는 ‘뛰어난 밀정’이 어디 있을까요. 나중에 호세핀이 ‘사실 널 죽이려 한 거야.’ 라고 말하는 것도 반전 같지가 않았습니다. 애초에 지령이 말도 안 되는 걸요. 주점에서 리소와 제레미가 나눈 대화는 좋았지만 그 대화의 힘이 뒤까지 이어지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이는 다른 주연(리소와 샤르나티 이야기에 깊이 관여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소와 가장 연이 깊을 티드메는 설명충이 됐고, 루다와 페르미는 마법 설정을 설명하는 소모품이며 세릭은 흔한 최강자 1입니다. 리소에게 몰아준 묘사와 감정선을 보면 작가님 실력이 모자란 게 아닙니다. 저 많은 캐릭터를 한정된 플롯에서 다룬다는 기획에 문제가 있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두 가지입니다. 캐릭터를 대폭 줄이거나 플롯과 세계관을 대폭 넓히는 거죠.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대중소설은 전자가 압도적으로 좋습니다. 작가님의 방향성과도 맞고요.
스토리텔링
플롯 역시 가볍습니다. 덕분에 이해는 쉽지만 자타공인 개연성 빌런인 저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가벼워도 얼개가 엉성하면 사람에 따라 거부감을 느낄 수 있지요.
프롤로그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건 단언합니다. 현재의 편지, 신문기사를 그대로 쓴 백과사전식 프롤로그는 명백히 좋지 못합니다. 처음 마녀강림을 접했을 때 이 1화에서 가장 큰 거부감을 느꼈어요. 작품 전체에 묻어나는 가벼움 때문에 크게 티가 안 날 뿐이죠. 주인공인 리소와 제레미 모두 매력적인 캐릭터이며 흥미로운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이런 프롤로그를 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와 신문기사에 쓰인 설정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요. 플롯만 잘 짜면 언제든 더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입니다.
이외에 수많은 조연들을 등장, 조명시키느라 생긴 개연성 균열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레미와 호세핀이 케이모와 만나는 장면이죠. 호세핀은 베테랑 밀정이고 베테랑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문기사에서 암호를 읽고, 낚시책으로 암호를 해독하고, 손녀 시타가 오자마자 암호문을 태워버립니다. 그런데 직후 등장하는 케이모는 신전 앞에서 대놓고 세릭 암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런 세상에, 지나가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못다 한 이야기
작중 메인 스토리인 마녀와 리소의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전투 묘사는 박진감 넘치고(특히 휘황찬란한 마법 배틀이) 등장인물들은 어색하지 않은 선에서 만화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유쾌합니다. 자칫 복잡할 수 있는 군상극임에도 작중 배경을 ‘망각의 밤’ 주점과 ‘동부 전선’에 한정한 건 기가 막힌 선택입니다. 모두 작가님이 바라시는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포석이죠.
하지만 기획과 구성이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분명 가벼우면서도 깊이 있는 명작이 될 수 있어요. 작가님은 그 역량과 소재와 열정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리소라는 캐릭터와 시간의 마녀라는 소재는 작가님의 역량이 온전히 발휘된 학입니다. 하지만 그 외 캐릭터와 플롯은 학이 되다만 닭 같았어요. 그것도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요. 넓은 정원에 학 몇 마리가 노니는 게 명작 군상극이라면, 현재 마녀강림은 좁은 케이지에 학 몇 마리와 닭떼(?)가 뭉쳐있는 느낌입니다. 보석은 보석인데 아직 원석인 거죠.
마녀강림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흔히 보기 힘든 판타지 군상극에 제 작품과 똑같은 전쟁서사여서 유난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네요. 피 튀기는 비평이 태반이지만 저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가능한 짓입니다. 꼭 그런 작품이 있거든요. 이것만 어떻게 하면 더 재밌을 텐데… 이것만 고치면 더 멋질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읽었더니 유난히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질 3부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까 3부에선 차렌 누님의 분량을 늘려주십시오. 사실 이게 본론이자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