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탈모 국회의원은 웃기게 되었는가 감상

대상작품: 완벽한 탈모 치료법 (작가: 렝고, 작품정보)
리뷰어: 소윤, 19년 4월, 조회 83

추천사보다는 글을 읽은 후 독특한 구성과 문체가 재밌어서 저 혼자 글을 다시 곱씹으며 주저리한 내용에 가깝습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했지만 작품을 읽고 와 주시면 좋겠어요!

 

 

「완벽한 탈모 치료법」은 풍자적 색채를 띤 유쾌한 글로 시작해서 어느 순간 훅 호러, 그것도 코스믹 호러에 가까운 압도적인 호러로 넘어가 있는 글이다.

 

1.김종문과 고민찬

이 글에 풍자적 색채가 있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JM성형외과 원장 김종문과 국회의원 고민찬이라는 인물들 때문. 풍자는 웃음을 무기로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것이고, 「완벽한 탈모 치료법」의 전반부에는 그 무기로서의 웃음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독자는 화자 김종문의 시선을 공유하지만, 그 시선은 딱히 공감하거나 동질감을 느낄 성질의 그것은 아니다.

“그래그래, 우리 김종문이가 운영하는 클리닉이면 믿을 만하지! 그런데, 너 성형외과 전문의잖아? 탈모 클리닉 개원하고, 이런 게 법적으로 문제될 건 없는 거야?”

“야, 니가 내 친구인데 안 될 게 뭐가 있냐?”

우리는 크게 하하하 웃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법적으로 문제? 그 말이 니 입에서 나오냐?’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김종문의 시선 속에서 고민찬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지만, 독자의 눈에 훤히 보이는 김종문의 겉과 속이 다른 사고의 흐름 역시 못나기는 매한가지다. 김종문이 고민찬의 “피둥피둥 피어오른 뱃살”을 묘사하고, 쪼잔한 사고방식에 약간의 불만을 토로하고, 그의 허풍을 비웃는 사이 독자는 대놓고 고민찬을 돈줄이자 빽으로 생각하며, 속으로는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비위를 맞추는 모습에 헛웃음을 짓는다.

이 구도가 코미디의 효과에서 더 나아가 풍자에 한 발을 담그게 되는 건 두 인물이 얄미운 기득권자의 전형들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 부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성공을 뒷받침하는 성실함이나 능력은 무슨, 김종문은 장사가 되지 않는 성형외과 원장실에서 뒹굴뒹굴하고 고민찬은 동료 국회의원들을 정성 들여 욕하기 바쁘다. 김종문의 내래이션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경기고와 서울대라는 학벌 역시 두 인물의 능력에 대한 증거라기보다는 기득권에 대해 독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캐리커쳐를 한 번 더 건드리는 기능을 수행한다.

 

2. 산울림의 노래와 함께 호러!

이런 불쾌하고 유쾌한 두 인물의 코믹한 티키타카가 끝나고 호러라는 장르가 등장하는 포인트는

나의 마음은 / 황무지 / 차가운 바람만 불고

라며 소설 속에서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고민찬이 국제전화를 걸어 이상한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부터 불안함은 시작되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인물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화법은 독자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눈으로 읽는 글에 귀로 들어야 하는 음악이 직접 인용되는 순간 어쨌든 독자는 일종의 충격을 받고 긴장하게 된다. 그 긴장은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운용될 수 있고, 「완벽한 탈모 치료법」에서 글쓴이는 이 음악으로 독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고민찬은 김종문의 전화를 받지 않고, 가사는 무언가 불안한 황무지를 노래하며,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듯한 바람이 부는 / 기름진 땅”이 가사에 등장하는 순간 음악은 끊겨버린다. “기름진 땅”이라는 말은 위안을 줄 수 있기 전에 끊기면서 오히려 황무지가 된 두피를 기름진 땅으로 만들겠다며 사라진 고민찬의 행방에 대한 불안감을 배가시킨다.

그리고 찾아오는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대해서는 긴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개입, 그리고 그 앞의 무력한 인간.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필자는 잘 모르겠지만) 유머 코드로 소비되며 김종문에게는 돈을 벌 우스꽝스러운 기회로 묘사되던 ‘탈모’라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글의 전반부에서는 가볍게 취급되던 요소가 급작스레 압도적인 폭력으로 탈바꿈해 화자에게 달려드는 것은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원래 처음부터 무서운 것보다, 웃기던 것이 무서워지는 게 더 좋은 공포인 법.

 

즐거운 읽기의 마지막에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면, 왜 하필 작품의 화자와 대상은 풍자적 인물들이었을까, 하는 것. 결말부의 공포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유쾌함이라면, 굳이 풍자일 필요는 없다. 물론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사실 풍자적 색채는 산울림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 사라진다. 호러를 마주하는 김종문은 (독자가 보고 웃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기득권자의 캐릭터가 아니라 독자 모두와 다름없이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무력한 인간이다. 글의 첫머리를 읽은 후에 스크롤을 계속 내릴 수 있게 한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작품의 중심에 가서는 휘발되는 풍자성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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