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연애 소설이란 어떤 연애 소설일까요. 어떤 연애 소설이 이상적일 수 있을까요.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였는데, 어쩌다 우연히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동갑내기 아이가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써 놓기엔 여긴 너무 공개된 장소네요. 어쨌든, 어쩌다 친해졌구요. 어쩌다 이름을 밝혔고요. 어쩌다 휴대전화번호를 교환했습니다. 어쩌다 통화를 한 번 했는데, 즐거웠습니다.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내달린 것처럼 가슴이 콩콩 뛰었습니다. 그 뒤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면 서로 통화를 했습니다. 집 앞을 지나쳐서, 동네를 몇 바퀴씩 돌면서, 어둑어둑한 가로등 밑을 서성거리면서, 혀 끝에서 미끄러지는 단어들을 겨우겨우 주워섬기면서요.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요. 딱 4월 이맘때쯤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 애가 그랬어요. 우리 동네 놀러올래, 라고요.
전화로 전해 들은 그 아이네 동네는 정말 먼 곳이었습니다. 거의 노선 끝에서 끝까지 이동해야 했으니 수도권 지하철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어요. 이것 참, 지하철을 자주 타고 다니는 지금 생각해도 먼 거리네요. 하지만 당시 제가 느꼈던 거리감은 단순히 ‘지하철 두 시간’의 거리감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거의 타지 않았거든요. 학교도 PC방도 노래방도 전부 동네 안에서 해결했으니 지하철은 일 년에 한 번 탈까말까. 그것도 매번 친구 혹은 가족들과 함께였으니 혼자 타 본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이라니. 환승도 두어 번씩이나 해야 한다니. 당시의 저에게는 가히 해외여행을 방불케 하는 거리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갔습니다. 인터넷으로 지하철 노선을 하나하나 검색해서, 어디행 열차를 어느 방향에서 타야 하는지, 출구는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까지 핸드폰에 꼬박꼬박 메모해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촌스럽기 그지없는 방법이었습니다. 여기 써 놓기도 부끄러울 정도네요. 그렇게 꼼꼼히 지하철을 탔으면서,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 애를 만나자마자 전부 잊어버렸거든요.
써 놓고 보니까 참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아는 건 고작 이름과 동네 뿐, 어느 학교를 다니고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애를 만나기 위해 별 짓을 다 해가면서 두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그 애랑 두 시간 놀고, 다시 두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다니요.
하지만, 하지만 어차피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지도. 하지만, 하지만 어차피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냥 덮어둬도 되는 것 아닌가. 모 아니면 도, 둘 중 무엇이라 해도 지금은 알 바 아니다. 절대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일을 하고 싶다. 아무리 뻔한 수작이어도 기꺼이 넘어가고 싶다. 꽝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 걸어보는 게 사랑이라면 기꺼이. 가은은 미소를 짓는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는 쪽이 아니”라던 사람이, “번호는 따지도 말고 주지도 않는 게 상책”이라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번호 좀 달라니. 술이 정말 사람을 바보로 만드네요. 내일 아침 일어나면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끌릴까요.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렐까요. 꽝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 걸어보는 게 사랑이라면, 그래서 사람을 한 번 뒤집어 놓는 게 사랑이라면,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게 연애라면, 연애소설은 참 바보 같은 소설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짝님의 <취중진담>은, 참 바보 같은 소설이네요.
+
소설의 형식이 참 마음에 듭니다. 꼬박꼬박 인물의 이름을 부르며 남 얘기하듯 풀어놓는 서술. 가장 재밌는 연애 이야기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이 남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