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예술할 수 있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1호선의 브레히트 (작가: 삶이황천길, 작품정보)
리뷰어: 코코아드림, 19년 4월, 조회 107

1.

필자는 예술 공연 관람을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직장 들어가기 전에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충실하게 따라서 영화는 물론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등 보러 갈 수 있는 모든 공연은 (금전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보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제가 지방에 거주한다는 점은 생각 외로 크게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도시도 작은 곳이 아니고 나름 규모있는 중소도시지만 제가 보고싶어 하는 공연이 지방 공연을 오는 것이 아닌 이상 공연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덕분에 저는 마음만은 ‘특별시민’이라 우기며 알바로 번 돈을 교통비와 공연 관람비로 자주 지출하곤 합니다. 특히 좋아하는 배우가 하는 1시간 반 가량의 연극을 보려고 이동시간 포함 왕복 6시간 가량을 이동해본 적도 있었죠. 재학중인 학교에서 공연현장체험학습 이라는 이름으로 2박 3일 간 연극, 뮤지컬 등을 무료로 관람시켜 주는 프로그램 공지를 띄우면 1번으로 신청할 정도이며 덕분에 체험학습을 담당하는 과의 담당 교수님은 (제가 해당 학과 학생이 아님에도) 제 이름과 얼굴을 알고 계실 정도입니다. 작년 동계 체험학습 당시 제가 과 행사 때문에 신청을 못하니 이번에는 안 가냐 물으셨을 정도로요.

 

2.

공연을 자주 보러 가는 만큼 제가 애용하는 교통수단은 바로 지하철 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곳은 버스도 타고 그러지만 지하철만큼 곳곳을 누비는 교통수단은 편리함의 극치를 달리니까요. 어쩌다 콘서트를 보고 경기도 쪽의 친척 집에서 하룻밤 묵어야 되면 버스나 택시 보다 훨씬 더 편리한 것이 바로 지하철 입니다. 교통체증이 생길 일도 없고 바가지 요금이 발생할 일도 없으니까요. 다만 지하철의 단점을 하나 꼽아보자면, 간간히 보이는 ‘잡상인’ 일 겁니다. 잡상인이나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사람들은 지방에서도 흔히 보이지만 교통 수단 안으로 직접 들어와 물건 홍보를 대놓고 하는 사람들은 흔한 일이 아니죠. 평화롭던 지하철에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와 품질 보장 하나 되지 않은 물건을 들고 와 들키면 경찰들과 혼신의 추격전을 펼치는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물품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요. 출처도 모르는 물건의 품질에 큰 기대를 거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일이긴 합니다만,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에 왔을 때 명곡들을 짜집기한 테잎을 팔러 온 잡상인이 테이프를 틀자마자 심령 비디오 마냥 다 늘어진 괴상한 소리가 나 울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3.

‘잡상인+연극’ 은 괴리감이 있는 주제처럼 들립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문화 생활로 향유하는 연극과 다수의 사람들이 ‘극혐’ 하는 잡상인의 조합이라니. 사실 저의 두뇌로는 잡상인이 연극 무대에 난입해 물건 파는 ‘대환장 깽판’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1호선의 브레히트’는 이러한 이질 적인, 어떤 면에서는 신선한 합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소위 ‘잡상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연극배우로 세울 생각을 하다니! 사실 곰곰히 따져보면 잡상인들은 연극에 최적화된 인물입니다. 그들의 쩌렁쩌렁한 목청은 좌석 끝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으며 태연한 척 물건을 파는 뻔뻔함은 무대 위에서도 ‘쫄지’ 않을 자신감이죠.

 

4.

작중 잡상인들이 출연하게 되는 연극, 일종의 극중극인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은 1939년 ‘베르톨드 브레히트’가 17세기에 일어난 30년 전쟁을 바탕으로 쓴 서사극 입니다. 극 중 주인공으로 언급되는 ‘억척어멈’ 안나 피에르링은 병사들에게 생필품을 팔고 다니는 인물입니다. 억척어멈은 벌이가 좋은 장사를 좇다 전쟁으로 두 아들과 딸을 잃습니다. 하지만 홀로 행상 마차를 끄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장사가 전쟁과 관련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죠. 브레히트는 돈벌이를 좇다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 억척어멈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 전달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 중 물건을 팔고 다니는 또 다른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 최칠봉씨를 포함한 연극에 출연하는 잡상인들 입니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오늘날에서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억척어멈’과 다른 노선을 걷습니다. 초반은 비슷했을 지언정 그들은 그들의 열정이 따르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작가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이라는 작품을 그저 극중극 만으로 사용하기 위해 선정한 것이 아닌 결국 자본주의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그들의 의지로 행동하게 되는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학생으로 위장한 극우단체로 대변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들은 자본에 목을 매는 인물이 아닌, 그들의 의지로 행동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억척어멈’과는 반대의 노선을 걸은 셈이죠.

 

5.

그들이 훗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연극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는 열린 결말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적어도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그들 의지로 결정했으며, 앞으로도 그들은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열린 결말이지만 그들의 앞에 놓인 현실에 그들은 잘 대처할 것입니다. 그들이 연극을 끝까지 이어가자 선택했던 것 처럼 말이죠.

 

6.

여담으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품 내가 아닌 현실에서는 국정원에 ‘브레히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고 신고하셔도 소용 없는 일입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당장 2017년에도 무대에 올랐던 작품이며 오는 4월 5일부터는 국립극단이 브레히트의 또 다른 작품인 ‘갈릴레이의 생애’를 무대에 올립니다. 시간이 난다면 국정원에 신고 대신 이 글을 한번 더 읽어보신 후 공연을 보러가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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