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초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무협장르에서 완전히 이탈하지는 않았고 독창적인 세계관이 나오니 판타지, 혹은 환상소설이라 해도 틀리진 않은 글이다. 게다가 기계까지 등장하니 유사 스팀펑크쯤 된다고 해야하나…?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혼종이 등장하였다.
혼란스런 장르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이 또 작중 주요인물들이 가진 성별의 모호함이다. 모연과 등라는 물론 창히와 강외까지 그들의 성격과 실력은 익히 잘 묘사되고 있으나 외양에 대한 그 어떤 일언반구도 없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어찌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즉, 해석하기에 따라 애송이 하나가 삼각관계를 만들려다 만 로맨스가 될 수도, 남자 셋의 찐한 브로맨스로 읽힐 수도. 아예 독창적 세계관을 빌어 성별이 딱히 없는 행성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창히가 가진 세 개의 바늘이 돌고도는 시계는 이 기묘한 삼각관계에 딱 들어맞는 소품이자 상징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뒤쳐졌다 여기는 모연이 시침이라면 먼저 제 갈길을 떠났다 한바퀴 돌아온 등라는 분침에. 스승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걸음을 겨루는 창히는 초침에 비유할만 하다. 셋은 저마다의 사상을 가지고 시계판 같이 스스로 도는 세계 위에서 교차해간다. 회전석이라는 소재도 재미있지만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물들간의 갈등이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어우려져 술술 읽혀간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두 마리 이상의 토끼를 모두 잡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장편으로의 연장을 바라는 욕심은 너무도 깔끔한 결말 때문에 바랄 수도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욕심이 나는 매력적인 세계관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