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인가 혁명인가, 세뇌인가 놀이인가 비평

대상작품: 선실의 달무티 (작가: 안병규,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2시간 전, 조회 10

이 소설은 카드놀이 규칙 설명을 겉으로 내세우면서, 내부적으로는 반란·혁명·체제 전복 과정의 논리를 스릴러적인 방식으로 배치한다. 선실에서 벌어지는 카드놀이는 단순한 오락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권력 감시를 피하는 완벽한 위장막이며, ‘놀이’라는 안전망 안에서 ‘반란’이라는 금기어는 합법적으로 돌아다닌다. 그렇게 그 안에서 반란의 언어와 사고가 자연스럽게 확산된다.
작가는 토미의 입을 빌려 ‘달무티’라는 카드게임을 매개로, 어떻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놀이가 체제 전복의 도구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토미는 게임 규칙을 설명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계급투쟁의 논리를 ‘잭’이라는 이름의 서술자에게 주입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숫자 1이 가장 강하지만 개수는 적다는 규칙은 권력자와 피지배자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광대’ 카드의 상징성이다. 광대는 게임 내에서 모든 숫자와 어울릴 수 있는 만능 카드이면서, 동시에 ‘반란’을 촉발하는 열쇠다. 이는 현실에서 광대가 가진 독특한 위치(궁전=선장실과 광장=갑판을 오가며 진실=선동을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와 정확히 일치한다.

토미 자신은 광대다. 그는 선장실을 드나들며 상층부의 세태를 목격하고, 하급 선원들에게 돌아와 그 경험을 선심쓰듯 나눠주고는 동시에 카드놀이로 상징되는 ‘불합리’로 번역해 퍼뜨린다.

 

작품은 혁명이나 반란이 갑자기, 순간적 폭력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의식화의 긴 과정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토미가 일으킨 것은 그가 말한대로 ‘반란’이다. 그러나, 거기에 동참한 사람들은 그것을 ‘반란’으로 생각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당한 권력구조를 전복시킨 ‘혁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자는 어느 순간 게임 설명이 아니라 선동적 발언에 가까운 흐름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이 점에서 텍스트는 현실과 놀이가 뒤섞이는 지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멱을’, ‘돼지’, ‘광대’, ‘반란’을 세번씩 반복하는 부분은 반복을 통한 주입과 세뇌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의미를 압축하여 짧은 단어를 반복해 제시하는 구조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서술자의 심리가 점차 해당 논리에 함몰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토미는 단순히 무력으로 선장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먼저 달무티 게임을 통해 선원들의 인식을 재편하고,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그가 항상 게임에서 왕 노릇을 했듯이 현실에서 권력을 획득했을 때조차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잭이 카드 뭉치를 받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야, 너희들. 달무티라는 놀이 알아?”로 끝나는 부분은 순환의 구조를 암시한다. 잭은 이제 다음 배에서 토미가 했던 역할을 반복할 것이다. ‘혁명’으로 포장된 반역정신은 이렇게 일상의 놀이로 위장하며 확산된다.

 

다만 문체가 때로는 서사적, 때로는 선언적 어조로 바뀌며, 줄바꿈과 단문의 반복, 대사와 설명의 줄바꿈이 장르적 문법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장르적 통일성을 강화하려면 이러한 단문 반복과 줄바꿈의 배치를 의미적 전개와 더 정밀하게 연동시키는 방식이 필요해 보인다.(줄바꿈좀요)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일상의 언어들, 놀이들, 관습들 속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뒤집으면 무엇이 가능한가? 작가는 카드놀이라는, 어찌보면 무해하고 가벼워보이는 소재를 통해, 가장 위험한 질문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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