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감상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검은 눈>은 직관적인 주제를 여러 상징을 통해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소설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와 소재는 또렷합니다. 살처분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살처분을 직접 다루기 보다는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드러냅니다. 검은 눈, 검은 관, 서쪽 하늘에서 눈과 관을 흩뿌리는 월드컵 경기장을 뒤집어 놓은 듯한 타원형 물체, 이유를 알 수 없는 할머니와 해피의 실종, 투명하게 바뀐 지하 등. 살처분, 혹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관계를 빗댄 것 같은 상징이 글 전체에 빼곡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두세번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검은 눈>을 처음 읽으면서 느낀 점은 당황스러움이었습니다. 여러 단편을 늘어놓고 읽고 있었기에 작품 태그나 작품 소개를 읽지 않았거든요. 물론 작품 소개를 읽었어도 무슨 내용인지 몰랐을 겁니다. 오월에 내리는 검은 눈의 실체라고 적혀있으니까요. “살처분”이라는 작품 태그를 읽었으면 조금 당황스러움이 적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처음 읽었을 때 주제를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미스터리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힌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초반에 AI와 구제역에 대한 뉴스가 지나쳐갔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너무 스쳐지나갔기에 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작품 주제와 장면이 따로 노는 듯한 이미지를 주었습니다. 따로 보았을 때는 나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검은 눈이 그렇습니다. 많은 이야기에서 눈은 모든 것을 덮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얗디 하얀 눈은 모든 색을 지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립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눈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색을 반전시켜 모든 것을 가리는 것이 아닌, 모두가 외면하고 숨기고 싶어하는 것을 밝히는 눈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작품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검은 타원형 물체도 있습니다. 타원형 물체를 생매장 구덩이를 뒤집어 놓은 것이고, 그 물체에서 죽은 가축들의 관이 떨어지고, 시쳇물이 검은 눈이 되어 내린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유기견이었던 해피를 등장시키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말하는 것도 그렇고요.
장면 장면도 흡입력 있었습니다. 검은 눈이 내리면서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장면, 검은 관을 피하면서 거리를 헤매는 ‘나’의 모습, 엄마가 호미로 파낸 유리가루처럼 하얗게 빛나는 흙의 입자, 집으로 돌아오는 할머니와 해피의 모습. 다소 난해했지만 글을 끝까지 읽어 나간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소설 전체와 연결되기 보다는 중후반부에 들어서야 급작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복선을 깨닫는 데 서투른 면이 있긴 하지만 투명한 대지에 드러난 생매장의 모습을 보아서야 이게 살처분에 관련된 소설이라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다시 읽으면 이 장면과 이 묘사가 왜 있었는지 알 수 있었지만요. 반전보다는 메세지가 더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거나, 유기견을 입양하는 사람이라 주제가 흐려지는 느낌도 받았고요.
다만 이 부분은 의도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동물에 조금 더 호의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소설 초반에 나온 살처분 뉴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넘어갔으니까요. 그만큼 우리들은 많은 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육류를 얻기위한 도살은 인간도 생물이니 어쩔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진화했으니까요.
하지만 살처분은 그저 예방적 차원에서, 그것도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기계적으로 생매장을 당합니다. 그렇게 큰 죽음과 고통이 퍼지는데도 그저 뉴스에 숫자로만 나타나죠. 살처분만이 아닙니다. 유기동물도 그렇죠. 교수 부인은 동물 병원에 묶어 놓고 도망칩니다. 그저 잊고 싶어합니다. 그저 번거롭다는 이유만으로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많은 죽음과 고통 위에 지탱되고 있는지. 그걸 덮어놓고 없는 것처럼 잊었던 게 얼마나 기만적인지.
구성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동안 알면서도 무관심하게 넘어간 살처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된 소설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